여고생들의 ‘탈코르셋’
“아~ 지옥의 ‘여리여리’(‘여자는 여리여리해야 한다’는 말이 싫다는 의미)” “여자는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 진짜 싫어” “여자 교복 입기 싫어. 허리 라인 들어가는 거 불편해.”
서울 혜원여고 페미니즘 동아리 ‘춘분’ 학생 7명이 포스트잇에 자신들이 겪은 ‘코르셋’을 적었다. 미용을 위해 허리를 졸라매는 복대를 뜻하는 코르셋은 화장과 다이어트 등 ‘꾸밈 노동’ 일체를 부르는 말로도 쓰인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랑구에 있는 시민단체 초록상상(동북여성환경연대) 사무실에선 ‘학생다움’, ‘소녀다움’, ‘여자다움’이란 말로 강요된 코르셋을 주제로 한 청소년 워크숍이 열렸다. 여성환경연대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여성의 몸과 외모에 대한 획일적 기준을 되돌아보는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미디어에서 제시한 천편일률의 여성 이미지가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고 건강마저 해친다는 문제 의식에 따른 ‘몸 다양성’ 교육이다.
여성 청소년들에게도 ‘탈코르셋’(코르셋을 벗자는 운동) 움직임이 확대되면서 이날 주제는 탈코르셋이 됐다. 학생들은 학생다움을 요구받으며 “여자애가 조신해야지”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들어가" 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환경연대 ‘몸 다양성’ 교육
나를 조이는 코르셋 알고
버릴 것 스스로 고르면서
획일적 기준 벗어나게 해
‘소녀다움’을 요구하는 이들의 입에선 이런 말이 따라 나왔다고 한다. “어디서 말대답이야”, “정치에 대해 뭘 알아”, “화장을 하면 안되지”. 여자다움을 강조하는 이들은 “살만 빼면 진짜 예쁠 텐데”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좀 웃어봐” 같은 말을 이어 내뱉었다고 했다. 사례가 나올 때마다 사무실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나왔다.
교육 활동가 가현씨(27)가 말했다. “학생에게는 화장을 하지 말라고 하고 여자에게는 화장을 하라고 해요. 여학생은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하나요. 누구도 여자들에게 어떻게 하고 싶냐고는 물어보지 않죠.”
학생들은 포스트잇에 쓴 여러 코르셋 중 자신이 버릴 것을 고르는 시간도 가졌다. 한 학생이 ‘털(밀기)’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을 가리키며 “찢자”고 했다. 코르셋을 버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화장 안 하는 거는 아직 못 버리겠어”, “외모지상주의는 버리지 못하겠어. 내가 얼빠(얼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속어)라” 같은 말도 나왔다. 화장이 코르셋인지를 두고 작은 논쟁도 벌어졌다. “화장은 남의 시선 때문에 하는 것 아니야?” “자기만족으로 화장하는 건 코르셋이 아니지 않아?” 가현씨가 정리에 나섰다. “양쪽 다 선택이 보장돼야 선택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죠. 하지만 버리지 못한다고 비난해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다들 각자의 코르셋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누구는 브래지어를 안 하지만 화장은 하고 싶고 누구는 그 반대일 수 있어요.”
이날 워크숍에 참여한 김모양(17)은 “(학교와) 달리 다 같이 이런 얘기를 한 게 좋았다. 나도 내 속에서 (여러 코르셋에) 조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앞으로 벗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진주 여성환경연대 활동가는 “여성의 몸은 사회가 원하는 대로 바꿔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 여성의 건강권은 물론 주체적 선택도 보장받기 어려운 현실”이라며 “변화 가능성이 큰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는 취지의 워크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