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세 100년,어느 21세 유학생의 다짐 “산이 움직이고 바닷물이 쳐들어와도 피하지 않겠다”

유정인 기자

일본 유학생 양주흡의 일기

“때는 마침 매화꽃이 절기를 지키고 꽃이 피었도다…(중략)…민족을 구제할 자는 우리 동경(도쿄)의 유학생이므로 산이 움직이더라도, 나는 움직이지 않겠다. 바닷물이 쳐들어와도 나는 피하지 않겠다.”

꼭 100년 전인 1919년 1월7일, 스물한 살 대학생이 써내려 간 일기의 한 대목이다. 일기장 주인은 재일유학생이었던 양주흡. 그는 동경과 경성(지금의 서울)에 머문 1919년 1월1일부터 4월13일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다. 식민지 젊은이의 열망과 절망, 그 안에서도 이어진 일상들이 활자가 돼 담겼다. 3·1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내면을 조금이나마 전해주는 기록이다.

양주흡은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이다. 동경 메이지대 법과에 다니다가, 1919년 1월31일 귀국했다. 동경에 머물던 때부터 독립운동은 시작됐다. “우리나라 국민은 낮이나 밤이나 암흑의 세상”(1월5일)이라고 고민하던 그는 이튿날 동경 유학생들 모임에 참석한다. 여기에서 비밀운동을 결의하고 이순신·을지문덕처럼 “독립의 개선가를 부를 것”이라고 결심을 적는다.

1919년 1월부터 체포되기 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
만세운동으로 들썩이던 민중과
삼엄한 경계의 분위기 기록 남겨

1월 중순부터 학교도 나가지 않고 귀국 준비에 들어갔다. 일은 쉬이 풀리지 않는다. “경성에 가서 민심을 선동할까, 만주로 갈까”(1월17일). 생각은 혼잡하고, 북청 본가에 부탁한 귀국 여비는 통 오지 않는다. “보내라는 돈은 어찌하여 아직 오지 않는가. 현재 경성에는 이태왕(고종) 서거로 인하여 민중이 회집하여 혁명을 하는데 절호의 기회인데 아-. 어찌하여야 하는가”(1월25일).

결국 본가에서 두 차례에 걸쳐 보낸 120원을 들고 귀국 배편에 올랐다. 북청을 들러 3월1일 경성으로 왔다. 3·1운동 당일이다. 그는 이날의 기억을 “오후 4시50분에 도착하여 알아보았더니 경성의 학생과 일반인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하는데 천도교 손병희씨와 기타 학생 및 일반인 약간 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3월부터 일기엔 당시 만세운동으로 들썩이던 민중과 삼엄한 경계의 분위기가 감돈다. 전국 각지의 시위, 순사의 체포와 가택수색 등의 내용이 매일같이 등장했다.

“북청의 소식을 들었더니 거산면에서는 헌병대와 충돌하여 한 명이 칼에 팔을 잘리어서 떨어졌다. 각 면에서는 모두 시위운동을 하였다고 한다”(3월26일), “오늘 밤부터 순사가 엄중히 취체를 하는 한편 건달들이 한복을 입고서 구타를 하므로 인하여 우리 동포들이 외출하는 사람이 적어졌다”(3월28일)….

양주흡은 시위 소식이 있는 곳마다 찾아다니지만, 이미 순사와 헌병에 의해 해산된 이후 도착하는 등 몇 차례 낭패를 본다. 포기하진 않았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3월25일 만세시위에 참여하고는, “오늘 밤 11시 경복궁 부근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일기장에 적는다.

엄혹한 시대에도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은 있었다. “여러 친구들이 와서 화투내기를 하고서 과자를 사 먹”(3월25일)기도 하고, 생일엔 “여러 친구를 데리고 오늘 밤에 내외주점으로 가서 3원60전의 음주를”(4월7일) 하기도 했다.

일기는 4월13일로 끊겼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하늘을 보고 개탄할 일이다.” 답답함을 호소하는 이 문장이 마지막이다. 다음날 그가 머물던 경성 간동(현 사간동)의 하숙집에 일제 순사가 들이닥쳤다. 방을 뒤진 순사는 “격렬한 불온내용”이 있다며 일기장을 압수하고 양주흡을 끌고 갔다. 그는 결국 3월25일 만세를 외친 혐의로 1년형을 받아 수감됐다.

출옥 후 삶은 어땠을까. 양주흡의 일기를 분석한 논문(최우석, <재일유학생의 국내 3·1운동 참여(2014)>)을 보면,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1922년 메이지대를 졸업했다.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뇌하고, 결단하고, 다시 주저하고, 끝내 한 발을 디뎠던 100년 전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 역시 시간의 흐름에 묻혔다.

▶▶100년 전 3·1운동, 그날의 기록

■특별취재팀 강병한(정치부), 유정인(문화부), 심진용(국제부), 박광연(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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