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세 100년, 경성 골목 하숙집, 검거 열풍도 못 막은 ‘해방의 꿈’ 자랐다

유정인 기자

꺾이지 않은 ‘평범한 영웅들’

사진 김영민 기자 그래픽 성덕환 기자 thekhan @kyunghyang.com 사진 크게보기

사진 김영민 기자 그래픽 성덕환 기자 thekhan @kyunghyang.com

‘경성의 하숙집을 샅샅이 뒤져라.’ 100년 전 3월, 경성 하숙집들에 일제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3·1운동 직후부터 무차별적인 ‘하숙집 털기’가 시작된 것이다. 경운동, 낙원동, 관훈동, 송현동, 종로통 5정목(종로5가) 등 지금의 서울 중심부에 올망졸망 들어찼던 하숙집에서 학생들이 붙들려 갔다. 하숙집은 일제엔 손쉬운 ‘집단 검거’ 장소, 학생들에겐 삼삼오오 모여 독립의 꿈을 키운 근거지였다. 잊혀진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던 곳,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1919년 경성의 하숙집 지도’를 일부 복원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에 수록된 일제의 3·1운동 검거자 신문기록에는 검거 장소와 일시가 겹치는 인물이 다수 등장한다. 대개 현재 종로구 일대 하숙집에 묵었던 10~20대 학생들이다. 당시 경성엔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부터 최남단 제주도 출신까지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다. 복수의 학생이 검거된 하숙집 11곳을 추려, 종로구청을 통해 현재 주소지를 확인했다.

‘경성부 북부 송현동 56번지’엔 ‘해명여관’이라는 하숙집이 있었다. 현재 서울 종로구 송현동 49-2번지, 안국동 사거리 앞 도로가 있는 곳이다. 3·1운동 당시 하숙집 중에서 가장 많은 수가 붙잡혀 간 장소다. 1919년 3월5일 밤, 이곳에서 적어도 8명의 학생이 순사들에게 끌려갔다. 함경남·북도, 평안남도, 황해도 등 북쪽에서 온 학생들이다. 당시엔 출신 지역이나 학교가 같은 학생들끼리 하숙집에 모여 사는 일이 잦았다.

독립운동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비밀 메시지는 하숙집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해명여관에 살던 중앙학교 1학년생 정석도는 3월1일 정오쯤 하숙집에 배부된 독립선언서를 보고 독립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았다. 3월4일에도 하숙집엔 만세운동을 알리는 투서가 돌았다. ‘장소는 남대문 역전, 시간은 5일 오전 9시, 태극기를 준비하라’는 내용이 적힌 쪽지였다. 정석도는 같은 하숙생 김응관 등과 이날 밤 태극기를 만들고, 다음날 남대문 역전으로 나가 만세를 불렀다. 학생들이 주도한 3·5 남대문 만세운동이다. 둘은 하숙집까지 무사히 귀가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일제 순사들이 해명여관에 들이닥쳐 이들을 끌고 갔다. 일제는 김응관에게 ‘해명여관에 하숙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만세운동에) 나갔는가’를 따져 물었다.

학생들 대거 참여한 3·1운동 직후
일제 순사들 무차별 ‘하숙집 털기’
현재 안국동 사거리 ‘해명여관’서
최소 8명으로 가장 많이 붙잡혀

배재고등보통학교생 김교승, 보성고등보통학교생 이시영·진용규·길원봉 등 하숙생들 역시 이날 밤 해명여관에서 붙잡혔다. 수창동(현 내수동) 하숙집에 살던 보성고보생 김기세는 해명여관에 하숙하는 친구를 방문했다가 같이 체포됐고, 경성고등보통학교생 박노영은 해명여관에 살며 3월1일과 5일 운동에 참여했다가 다른 하숙집에서 체포됐다. 박노영은 옮겨간 하숙집에서 친구들과 독립운동 격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고향에서 매달 10~20원을 받아 생활을 꾸렸던 학생들에겐 인쇄비도 버거웠다. ‘밥값을 줘야 한다’며 하숙집 주인에게 돈을 빌려 격문 인쇄비를 댔다.

5일 밤부터 극에 달한 일제의 ‘하숙집 털기’는 다음날 아침에도 계속됐다. 현재 상가들이 조밀하게 서 있는 종로5가에 이때 학생들이 집단 검거된 하숙집이 있었다. ‘경성부 종로통 5정목 120번지’, 현재 서울 종로5가 120번지다.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학생들이 모여살던 이곳엔 3월6일 아침 일제 순사들이 들이닥쳤다. 경성공업전문학교생 박동진과 안상철, 경성의학전문학교생 최경하와 이규선 등 최소 4명이 끌려갔다.

3·5 남대문 만세운동 주도 학생들
하숙집 중심으로 비밀 메시지 배부
서울 시위로 재판 회부된 학생 중
북측 지역 출신이 거의 절반 차지

길 건너 종로5정목 232번지(현 종로5가 231-9) 하숙집에서도 비슷한 시각 체포가 시작됐다. 경성공전생 김대우·박창배·진연근 등 평안남도 출신 학생 3명이 한꺼번에 하숙집에서 붙들렸다. 여기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있는 경성부 효제동 202번지(현 효제동 202)의 경성의전생 하숙집도 마찬가지다. 효제동 202번지엔 부산과 경기도, 경상남도, 황해도 등 여러 지역 출신 학생들이 모여 살았다. 모두 경성의전생들이다. 부산 출신 허영조, 수원 출신 김영진, 경남 동래군 출신 황용주, 황해도 재령군 출신 정인철 등 4명이 6일 아침 함께 일본 순사에 체포됐다.

이외에 간동 88번지(현 사간동 87) 하숙집에 모여 살던,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 고재완·양주흡 등 일본에 유학하다 돌아온 학생들도 하숙집에서 체포됐다. 압수된 양주흡의 일기엔 “특별순사가 온다고 해서 몸을 피하기 위하여 외출을 하였다”(3월10일), “오후 3시경 일본인 순사가 와서 조사를 하였다”(3월13일), “내일 가택수색을 한다고 해서 상자 안에 있는 일반서류를 깊이 감추어 두었다”(3월17일) 등 급박했던 당시 분위기가 적혀 있다.

다수의 학생이 붙들린 하숙집 중에선 북측 지역 출신들이 모여 산 곳이 많았다. 한양대 박찬승 교수의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된 서울시위’ 발표문에 보면 3월1·5·22일 시위로 재판에 회부된 학생 231명 중 함경남·북도 출신 학생이 69명으로 전체의 30%로 가장 많았다. 평안남·북도 45명을 합치면 49%로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박 교수는 당시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으로 구성된 ‘서북친목회’의 영향으로 분석했다.

이제 경성 하숙집들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100년 사이 좁은 골목은 큰 길이 됐다. 실핏줄처럼 경성 시내에 퍼져 있던 하숙집들 자리엔 노래방이나 갤러리 등이 입주한 상가 건물과 공원 등이 들어섰다. 그들의 흔적이 지워진 거리에도 “죽을 때까지 기회가 닿는 대로 운동하겠다”(김응관)고 버텼던 평범한 학생들,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골목골목 서려 있다.

▶▶100년 전 3·1운동, 그날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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