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세 100년, 만세 고창한다고 독립이 되는가? 조선인 전부가 그 마음이면 된다!

유정인 기자

신문조서로 본 100년 전 그들 - 거리로 나온 보통사람들 이야기

조영섭 농민 신문조서 원문.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조영섭 농민 신문조서 원문.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캡처

<1부> 우리는 독립운동가입니다 ③ 일제 신문조서로 본 3·1운동 주역들

100년 전 그날은 몇몇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날의 울림은 거리의 만세 소리를 지나칠 수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독립만세’ 소리를 보탰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다. 그날의 힘은 학교 기숙사에서, 총독부 순사로 보초를 서던 곳에서, 농촌의 민가에서 뛰쳐나와 나란히 걸었던 모든 사람들의 걸음에서 나왔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당시 거리에 나섰던 보통 사람들이 남긴 말들을 찾았다.

문: 기를 들고 다중이 모여서 만세를 고창한다고 독립이 되는가.

답: 된다.

문: 어떤 이유로 독립이 되는가.

답: 조선인이 전부가 그 마음이 되어서 하면 자연히 독립은 된다고 생각한다.

문: 보조원(헌병), 순사보 등을 보면 어떤 생각이 나는가.

답: 매우 기분이 나쁘다.



51세 농민 조영섭은 1919년 3월4일 헌병대에 끌려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3·1운동이 시작된 지 사흘째 되던 날 황해도 용산면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바로 체포됐다.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진 않았다. 근처를 지나가다 만세 소리를 듣고 합류했다. 3·1운동의 거대한 행렬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에는 일제가 3·1운동 참여자들을 취조한 신문조서들이 수록돼 있다. 서울지방검찰청(현 서울중앙지검)에 보관된 것을 번역했다. 3월1일부터 4월4일까지 전국 14개 지역에서 있었던 만세운동 신문조서로, 피고인·증인·참고인을 합쳐 2000건이 넘는다. 3월1일부터 3개월 동안 전국 1500여차례, 당시 인구(2000만명)의 열 명 중 한 명꼴인 200만명이 참여한 전체 3·1운동 규모에는 못 미친다. 사망 7500여명, 부상 1만5000여명, 피검자 4만7000여명이라는 규모를 담기에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100년을 넘어 당시 참가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짐작하게 하는 자료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사진 크게보기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삶에 쪼들린 2000만 동포 구하기 위해”
“각오하고 한 일 목숨 아깝다고 생각 안 해”
3·1운동 참여한 이들만큼 사연도 다양
전국 퍼진 ‘만세’는 독립운동 큰 줄기 돼

결근계를 내고 참가한 광화문우체국 직원, 평안남도 진남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곡물 중매인, ‘자유의 종’으로 보신각 종을 울린 세브란스병원 회계원, 일부러 술을 마시고 용기를 내 나온 학생평북 선천군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부른 신성학교 교원, 도쿄물리학교 유학생, 덕수궁 파출소에서 근무하던 조선총독부 순사함경남도 북청군 시위에 나섰다 붙잡힌 농민, 학생, 소년, 소녀, 노인, 부녀, 유생, 직공, 상인, 점원, 청년, 차부…

무수한 ‘보통씨’, 하나의 열망…독립의 마중물 되다

3·1운동은 처음부터 하나의 지역이나 계층·성별로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었다. 1일 오후 2시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가졌고,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은 시내 곳곳을 누비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평양·진남포·안주(평남), 선천·의주(평북), 원산(함남) 등 북쪽 6개 도시에서도 만세 시위가 있었다. 북쪽 함경북도부터 남쪽 제주도까지 하나의 열망을 품은 움직임이었다.

“이 군중은 학생 소년 소녀 노인 부녀 직공 상인 점원 청년 차부 시골에서 온 농부 등 모든 계급 노약 남녀의 집합이었다…학생은 제복을 입은 채로 손에는 학교 가방을 들고, 점원은 붓을 손에 들고 직공은 연장을, 노인은 긴 장죽을 입에 물고 있었다.”(조선총독관방서무부 조사록)

당시 일제 자료에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쏟아져 나왔던 참가자들의 모습이 기록돼 있다. 그 거리에서 붙잡혀 일제 신문대에 선 이들의 면면 역시 이를 입증한다. 결근계를 내고 참가한 광화문우체국 직원, 평안남도 진남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곡물 중매인, ‘자유의 종’으로 보신각 종을 울린 세브란스병원 회계원, 일부러 술을 마시고 용기를 내 나온 학생, 유생과 농민 등 일제 신문기록에 기록된 직업도 사연도 제각각이었다.

■ 나는 왜 만세를 불렀나

문: 너는 그 같은 운동을 하면 조선이 독립된다고 믿었는가.

답: 원래 믿고 있었다. 결코 배타적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전 조선민족의 요구로서 양심에서 발분한 자유적 의사이다.

문: 계속해서 운동을 하기로 돼 있나.

답: 목적을 달성한다면 모르나, 그렇지 못하다면 영원에 걸쳐서 같은 운동을 반복하여 속행할 결심이다.



신성학교 교원으로 3월1일 평북 선천군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부른 김지웅의 말이다.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생이었던 최정숙은 “누구라도 남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은 싫은 것”이라며 “너무 열광하고 있어서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3월10일 함경남도 북청군 시위에 나섰다 붙잡힌 농민 조경화는 “타인의 집보다 내 집이 좋다는 것과 같은 취지”라고 말했다.

왜 독립운동에 나섰느냐는 일제의 질문에 사람들은 ‘양심’과 ‘자유’, ‘정의와 인도’를 이야기했다. 어떤 이는 공화국의 꿈을, 어떤 이는 일본에 빼앗긴 토지와 농지를 되찾을 소망을 말했지만 모두 ‘독립’이라는 열망을 공유했다. 이는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결단이기도 했다. 덕수궁 파출소에서 근무하던 조선총독부 순사 정호섭에게도 그랬다. 그는 3월5일 아이가 아프다며 휴가를 얻은 뒤 손가락을 물어뜯어 ‘독립만세’ 혈서를 썼다. 깃발에 혈서를 매달고 만세를 외치는 그를 딸과 같은 학교 여학생들이 뒤따랐다. 경무총감부에 끌려가서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말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문: 어째서 국기를 만들고, 또 혈서 썼는가.

답: 신문에서 이번 강화회의에서 약소국을 독립시킨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조선도 독립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했던 것이다.

문: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

답: 삶에 쪼들리고 있는 2000만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문: 무거운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가.

답: 그렇다. 각오하고서 한 일이기 때문에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노예가 됐다”, “목욕탕도 못 가”

3·1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의 답변에는 당시 처절하게 무너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매일 목격하고 체험하는 일상의 모순 역시 이들을 ‘독립만세’의 길로 이끌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경성고등보통학교생 심대섭(심훈의 본명)은 3·1운동에 참여한 후 끌려온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육제도가 불완전한 까닭으로 조선인은 생존경쟁의 패자가 되어 마침내 일본인의 노예가 되게 되었다. 또 조선에 대한 정치는 무단정치로서 문관까지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조선인을 적대시하는 것”이라고 토로한다. 후일 <상록수> <그날이 오면> 등의 작품을 남긴 민족작가 심훈은 이 일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문: 독립을 희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모두가 불평인데, 교육제도가 불완전하고 소학교교육 같은 것은 일본어만 가르치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교육은 하지 않는다. 일본인이 1000호 이주해 오면 조선인은 2000호가 딴 데로 이주해야 해 해마다 간도 등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많은 것을 목격하고 있다.



도쿄물리학교 유학생으로 귀국해서 3·1운동에 참여한 고재완의 말이다. “본정(지금의 충무로)의 욕탕에 가면 조선 사람은 목욕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보성고등보통학교생 장명식), “소유하는 땅이 없어서 산중에서 고구마라도 심는 수밖에 없으나 그런 땅은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어 경작할 수가 없는 상태”(농민 이욱성)라는 말에서도 피폐한 현실이 드러난다.

■ 가혹했던 고문 “또 나설 것인가”

당시 참가자들의 실제 행동과 마음은 일제 신문조서에 다 담기지 못한다. 끌려오고 나서 겪었을 압박과 불안감, 고문, 눈앞의 일제 검경과 문답을 주고받는 데 따른 팽팽한 긴장관계가 생략돼 있기 때문이다. 3월10일 함경남도 북청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잡힌 이들의 신문조서에서는 당시 참가자들이 겪었을 가혹한 고문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농민 김계식은 “나체가 되어 3일간이나 괴롭힘을 받고, 담뱃불로 손을 지지거나 매달아 놓고 군도로 죽인다고 위협하였으므로 신문한 대로라고 사실 아닌 진술을 했던 것”이라고 했다. “5·6일 동안 때리고 두들기면서 고문하는 고로” “헌병이 나의 다리를 때리고 그 후 20일 남짓 구속했다” 등 함께 붙잡혀 온 농민들의 증언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는 이 같은 분위기에서 대개 신문을 마칠 때쯤 ‘장래에도 독립운동에 나설 것이냐’고 물었다. 많은 사람들은 “감옥에서 나가서도 생명이 이어지는 한 실행하겠다”(경성공업전문학교생 유만종), “아무리 소수이고 아무리 엄벌을 해도 결코 상관하지 않는다”(농민 이문일)고 했다.

문: 장래에도 독립운동을 할 생각인가.

답: 지금 독립이 안되어도 내가 감옥에서 나올 때는 독립이 되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독립이 안되었을 때 운동할 것인가 하는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경성고등보통학교생 박노영처럼 “장래의 일은 모른다”고 답하거나, 침묵으로 버틴 경우도 적지 않았다. ‘모른다’는 한마디에도 수많은 행간이 있다. 어떤 경우든 자신의 생을 걸고 만세를 부르고, 각자 방식으로 일제의 서슬 앞에서 맞섰던 이들이다. 그들이 바랐던 독립은 바로 오지 않았다. 이들이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일제는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만. 3·1운동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전과 같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 곳곳에 스며든 독립의 열망은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계 전반으로 퍼져 거대한 물결을 이뤘다. 그렇게 보통 사람들은 함께 역사가 됐다.

▶▶100년 전 3·1운동, 그날의 기록

※참조: 국사편찬위,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 ‘한민족독립운동사’ 3·1운동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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