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 베이징이 정치 수도라면 상하이는 경제 수도다. 중국 동부의 장강 하구에 있는 직할시로 상업, 금융, 산업, 통신의 중심지인 상하이는 20세기 초반 뉴욕, 런던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였다. 상하이는 중국은 물론이고 아시아의 그 어느 도시보다 세계 각국의 문화와 건축 등 다양한 양식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황포강변의 와이탄은 마치 1930년대 유럽의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웅장하고 고풍스런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하다. 상하이의 이런 외적인 아름다움 이면에는 중국이 겪은 식민 지배의 아픔이 배어 있다.
중국의 남쪽인 홍콩이 약 100년에 걸친 영국의 지배로 공기와 토양까지 서구 정취가 물씬 난다면 상하이 역시 홍콩과는 다른 색깔의 ‘서양적 정취’를 품고 있다. 물론 두 도시의 공통점은 ‘강제 개방’이다.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의 쇠퇴와 맞물려 이 두 도시는 ‘영국의 식민 지배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그 과정에서 홍콩이 완벽한 영국화의 길을 걸었다면 상하이는 ‘반쪽뿐인 개화’를 겪었다. 그것은 상하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공간, 즉 조계지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은 아편 전쟁을 기점으로 공식화되면서 상하이에는 영국, 미국 등의 합법 관할 지역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이 조계지는 지금의 대사관처럼 중국 안에 있는 영국, 미국 등의 땅이었다. 중국에 있지만 중국의 지배나 통제를 받지 않고 오로지 조계지 관할 국가의 권한만이 행사되는 곳이었다. 이 조계지로 인해 상하이는 역설적으로 성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계지 국가의 문화, 경제, 정치 등 그들의 행정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작은 영국, 미국, 일본이 된 것이다. 상하이의 조계지 역사는 약 100년이지만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1930년대다. 이 무렵 세계는 전쟁의 기운, 약육강식의 국제 관계, 경제적 수탈의 시대였다. 세계 열강은 중국을 ‘종이 호랑이’로 만들며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비단 돈뿐만 아니었다. 정치, 군사적 대립이 치열해지면서 각국의 정예 정보 조직이 상하이에서 활동하며 치열한 스파이 전쟁이 벌어졌다. 그 단면을 드러낸 영화가 바로 이안 감독의 ‘색, 계’다.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당시 오디션을 통과해 여우 주연으로 발탁된 탕웨이와 홍콩 스타 양조위의 파격적인 정사 신으로 입소문이 났지만, 영화는 ‘색色’으로 접근하는 여성 스파이 탕웨이와 ‘계戒’로 무장한 일본 괴뢰 정부 정보기관 장관 양조위와의 치열하면서도 슬픈 사랑을 정제된 언어로 담아낸 수작이다.
탕웨이가 연기한 왕치아즈는 한마디로 비련의 주인공이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가 버리고 의지할 곳이 없다. 전쟁을 피해 온 홍콩에서 대학교에 다니던 왕치아즈는 우연히 연극부에 가입하고 그곳에서 선배 광위민(왕리홍)을 만난다. 광위민은 당시 대부분의 중국 청년들처럼 가슴에 뜨거운 항일의 기운을 간직한 애국 청년. 그는 왕치아즈를 이용해 친일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암살하려 한다. 탕웨이는 이 계획의 도구일 뿐이다. 그녀가 광위민의 요청을 수락해 막 부인으로 신분을 위장해 이에게 접근, 자신의 미모와 몸을 무기로 그를 사로잡은 것은 애국심도, 항일의 불타는 기운도 아니다. 단지 마음 하나 의지할 곳 없던 탕웨이로서는 선배 광위민의 존재나 그가 속해 있던 항일단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3년 뒤 광위민과 왕치아즈는 상하이에서 이의 암살 계획을 시도한다. 왕치아즈는 정보기관 장관답게 아무도 믿지 않는 이를 자신의 몸으로 휘감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가 자신을 믿는 만큼 그를 점점 사랑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며 갈등에 휘말린다.
막 부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왕치아즈는 이 부인에게 홍콩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며 접근하고 드디어 이의 집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처음 마주친 왕치아즈와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강렬한 운명적 끌림을 느낀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 음식이 맛없는 레스토랑에 자주 온다고, 또 어두운 곳을 본능적으로 싫어하지만 영화관이 좋다는 왕치아즈를 따라 극장에 오는 이. 그는 점점 왕치아즈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동시에 경계를 풀지 않는다. 그 무렵, 이가 상하이로 발령받는다. 이의 암살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왕치아즈는 순결을 잃는다.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순결이 이에게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을 알고 원치 않는 선배와 잠자리를 갖는다. 차라리 그 상대가 광위민이었다면… 광위민에 대한 왕치아즈의 마음은 한 걸음 더 멀어진다.
1941년 상하이. 왕치아즈에게 광위민이 다시 은밀한 제안을 한다. 상하이로 가서 이를 암살하자고. 왕치아즈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부인이 자주 다니는 호텔에 투숙한 왕치아즈는 우연히 이 부인을 만난 것으로 가장해 이 부인의 권유로 이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이 부인, 친일파 왕정웨이 정부의 고위층 부인들과 마작을 하는 왕치아즈. 퇴근하고 집에 온 이는 막 부인이 된 왕치아즈를 만난다. 3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욕망과 간절함이 교차한다. 왕치아즈는 담배를 꺼낸다. “이 부인에게 드릴 선물이에요. 당신에게는 선물을 준비 못했어요.”
이는 조용히 말한다. “당신이 돌아와 준 게 선물이오.”
텅 빈 집, 이 부인은 친구들과 밤새 마작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고 이는 남경으로 갔다. 방 안에서 짐을 꾸리는 왕치아즈. 그녀는 이가 집에 올 것을 짐작한다. 그리고 일부러 짐을 싸 이 집에서 나갈 것임을 암시한다. 왕치아즈의 예상대로 집에 들어오는 이. 그는 왕치아즈의 방에 들어서며 짐을 본다. 왕치아즈를 껴안는 이. 왕치아즈는 이에게 ‘언제까지 당신이 오는 것만을 기다릴 수 없다’고 말하며 ‘집을 얻어 달라’고 요구한다. 두 사람은 다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왕치아즈는 색으로 이를 유혹하고, 이는 색에 대한 경계를 조금씩 풀기 시작한다.
점점 마음이 흔들리는 왕치아즈. 그녀는 광위민과 함께 항일 단체 지도부를 만나다. 그리고 빠른 결행을 촉구한다. 항일단 간부는 오히려 광위민과 왕치아즈를 나무란다.
“나도 그를 죽이고 싶다. 아내와 아이가 내 눈앞에서 죽어 갔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왕치아즈가 말한다.
“날 안을 때마다 그는 마치 뱀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어요. 내 심장까지. 난 노예처럼 그를 받아들이고 충실히 내 역할을 다해 그의 마음을 얻어 내죠. 그는 매번 안을 때면 내가 피를 흘리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를 때까지 멈추지 않죠. 그때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죠. 그리고 그는 이런 내 반응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알아요. 난 무서워요. 이렇게… 어느 순간 사로잡히고 마는 건 내가 되고 말 거예요. 점점 두려워져요. 마침내 그가 내 심장에 들어오는 순간, 아무 것도 안 하고 내내 구경만 하고 있던 당신들이 뛰어 들어와 그의 머리를 쏴 버릴까 봐.”
절규하듯 내뱉는 왕치아즈의 속마음을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항일단 간부와 광위민은 잠시 후 조용히 나간다. 고개를 숙이는 왕치아즈. 체념과 굳은 결심이 그녀의 얼굴에 교차한다.
왕치아즈는 이와 사랑을 나눈다. 두 사람의 눈이 이가 풀어놓은 권총으로 향한다. 잠시 후 왕치아즈는 이의 눈을 가린다. 가만히 있는 이. 이가 왕치아즈를 진정으로 믿는다는 증거다. 왕치아즈는 이를 꼭 껴안는다. 며칠 후, 두 사람은 일본식 주점에서 만난다. 왕치아즈는 이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그리고 그에게 노래를 불러 주겠다고 말한다. 왕치아즈의 고향 노래를.
“하늘 끝, 바다 끝으로 지기를 찾노라. 소녀는 노래를 부르고 그대는 거문고를 타네요. 우린 하나의 마음이에요. 고향의 산마루에 올라서 북쪽을 바라보면 흐르는 눈물에 옷깃이 젖어 드네요. 소녀는 그대가 그리워요. 고난을 같이 한 우리 사랑이 진정한 사랑, 우리 사랑은 깊은 거예요. 인생이여, 청춘을 아끼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어요. 소녀는 실이고 그대는 바늘이에요. 우리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보석상 2층.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두 사람 앞에 놓여 있다. 흡족한 미소를 짓는 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껴 보는 왕치아즈. 그녀가 이에게 묻는다.
“이 다이아몬드 반지가 마음에 들어요?”
“난 다이아몬드에는 관심 없어. 그걸 낀 당신 손을 보고 싶었지.”
복잡한 표정의 왕치아즈. 그녀가 말한다.
“이런 반지는 누가 훔쳐 갈까 봐 두려워요.”
“끼고 있어. 내가 지켜 줄게.” 말없이 이를 바라보는 왕치아즈. 잠시 후 그녀는 결심을 한 듯 이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한다.
“가요… 어서!”
눈을 크게 뜨고 왕치아즈를 바라보던 이. 그리고 재빨리 보석상에서 나와 자동차로 뛰어간다. “문 열어. 빨리!”
보석상에서 나온 왕치아즈는 천천히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인력거를 탄다. 잠시 후, 상하이 거리에는 검문검색이 펼쳐지고 인력거는 멈춘다. 외투 깃에서 캡슐을 꺼내는 왕치아즈. 캡슐에는 청산가리가 들어 있다. 캡슐을 만지작거리는 왕치아즈. 끝내 삼키지 않는다.
그 시간, 정보부로 돌아온 이는 부하에게서 왕치아즈의 실체를 보고 받는다.
“왕치아즈는 대학교 연극부에서 항일단에 포섭되었습니다. 그녀 주변의 항일단 지하 조직을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애초부터 나에게 그녀의 정체를 왜 보고하지 않았나?”
“그건, 장관님도 그녀에게 포섭되었을까 봐요.”
말없이 부하를 쳐다보던 이는 왕치아즈와 광위민 등 항일단의 사형 집행문에 사인을 한다.
“오늘, 10시 안에 처형을 집행하도록. 상하이 교외 벌판으로 가서.”
부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놓는다.
“장관님 것 같아서 갖고 왔습니다.”
“그건, 내 것이 아니네.”
황량한 상하이 교외의 벌판. 왕치아즈와 광위민 등은 사형장에 끌려 나온다. 왕치아즈는 무표정하게 광위민을 바라본다. 그 시간, 집에 돌아온 이는 왕치아즈가 머물던 방에 들어선다. 빈 침대. 이 부인이 와 이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 일도 아냐. 당신은 가서 마작이나 하고 놀아요.” 조용히 돌아서는 이 부인. 그 순간 시계의 괘종이 10시를 알린다. 왕치아즈가 죽은 시간이다. 무표정하게 소리를 듣는 이. 잠시 후 그가 일어나 방에서 걸어 나온다. 짙은 그림자가 막 부인의 침대에 드리운다.
탕웨이가 맡은 왕치아즈는 1930년대 후반 ‘상하이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며 국민당 정부를 위해 일했던 정핑루라는 실제 인물이다. 1918년생인 정핑루는 푸단대학 법과대 교수인 아버지와 일본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정핑루는 1937년 상하이 정법학원 법과대에 입학하고 그해 7월 상하이 유명 잡지 『좋은 벗』 표지 모델이 되면서 사교계의 주목을 받는다. 좋은 집안, 타고난 미모,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으로 정핑루는 단박에 사교계를 사로잡는다.
그녀를 눈여겨본 이는 국민당 정보기관인 조사통계실장 천바오화. 그는 정핑루에게 접근해 국민당 정부, 중국 민중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청하고 정핑루는 이를 수락한다. 당시 국민당 조사통계실의 목표는 친일파 왕정웨이가 세운 괴뢰 정부 정보기관 ‘76호’ 책임자 딩모춘이다. 영화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이’의 실제 모델이다. 딩모춘은 ‘상하이의 도살자’, ‘상하이의 색정광’으로 불리는 인물. 그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원래 중국 공산당의 핵심 요원이던 딩모춘은 국민당 당원으로 전향한다. 국민당에서 딩모춘은 정보기관인 조사통계실에서 근무한 후 중일 전쟁 이후 일본이 세운 왕정웨이 괴뢰 정부의 정보기관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던 딩모춘으로 인해 당시 공산당은 물론이고 국민당 조사통계실은 조직이 거의 와해될 정도로 딩모춘에게 탄압을 받았다. 후에 기록을 보면 1937년부터 1941년까지 4년 동안 수천 명의 국민당 요원들이 딩모춘에게 구금, 납치, 암살을 당했다고 한다.
이에 천바오화는 정핑루를 이용해 딩모춘 암살 계획을 세운 것. 정핑루는 단숨에 딩모춘을 사로잡고 그의 정부가 된다. 첫 번째 딩모춘 암살 시도는 1939년에 이루어졌다. 정핑루가 집에 국민당 암살단을 잠복시킨 후 딩모춘을 초대한 것. 하지만 집에 들어오던 딩모춘이 갑자기 돌아가버리면서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정핑루는 그해 12월 딩모춘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후 크리스마스 선물로 상하이 중심가에 있는 시베리아 모피 전문점에서 코트를 사 달라고 요청한다. 두 사람은 같이 모피 전문점에 들어갔지만 딩모춘이 곧바로 다른 문으로 도망을 쳐 두 번째 암살 기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영화에서는 이 모피점이 보석상으로 바뀐 것이다. 수상한 남성들이 모피 전문점 근처에 있는 것을 보고 딩모춘이 일단 피신한 것이다.
1939년 12월 24일, 정핑루는 상하이 조계지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딩모춘을 기다리지만 레스토랑에 온 것은 ‘76호’ 요원들. 그 자리에서 정핑루는 상하이 정안사 서쪽 제스필드 76호에 위치한 딩모춘의 ‘76호’로 잡혀 간다. 그 후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정핑루는 국민당 조사통계실의 정보를 밝히지 않고 자신이 딩모춘을 너무나 사랑해서 벌인 일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정핑루는 1941년 2월, 상하이 교외 벌판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정핑루의 나이 22세였다. 영화 속 왕치아즈의 비극적인 최후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딩모춘은 일본이 패전한 후 국민당에게 체포되었고 1947년 7월 난징교도소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딩모춘의 나이 46세였다.
상하이 조계지의 최전성기는 1912년부터 중일 전쟁 바로 직전인 1936년까지, 약 25년간이었다. 특히 1921년 중국 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중국 공산당이 탄생한 도시도 바로 상하이이다. 이로 인해 상하이에서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치열한 정보 전쟁이 벌어졌다. 또한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중국과 일본의 정보전이, 이후 일본, 중국, 영국, 독일,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벌이는 아시아 최대의 정보 전쟁터가 되었다. 물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상하이의 미국과 영국 조계지를 강제로 점령해 미국과 영국은 공식적으로 철수했고, 이후 상하이의 조계지 시대는 약 100년 만에 막을 내렸다.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위키피디아, Daum영화]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61호 (19.01.0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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