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용균씨 어머니 “아들에게 조금은 할말이 생겼다···그런데 이렇게 끝날까 두렵다”

태안|선명수 기자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 도중 숨진 김용균씨의 빈소가 마련된 충남 태안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어머니 김미숙씨가 30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다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 도중 숨진 김용균씨의 빈소가 마련된 충남 태안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어머니 김미숙씨가 30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다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엄마는 그날 처음으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개정안이 28년 만에 국회를 통과한 날, 아들을 잃은 이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엄마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아들의 동료를 안아줬다.

법안 통과가 끝은 아니었다. 입사 3개월 만에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태안화력발전소 9·10호기 옆에서는 여전히 1~8호기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고 있다. 마침내 국회 문턱을 넘은 산안법 개정안은 위험작업의 사내 하도급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아들의 동료들은 여전히 발전소 내 ‘2등 시민’인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로 일해야 한다. 아들과 그 동료들이 해왔던 업무는 이 법이 규정한 ‘위험 작업’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아들이 죽지 않았으면 바뀌지 않았을 법, ‘다른 아이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국회에 읍소하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여러 의안 속에 파묻혀 있었을 그 법이 통과됐지만 아들과 동료들은 수혜를 받지 못한다. 국회 처리 과정에서 법안 자체가 후퇴한 탓이다.

지난 11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은 하청노동자 김용균씨(24)의 어머니 김미숙씨(50)를 30일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충남 태안보건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김씨는 여야가 이견 차로 시간을 끈 사흘 동안 꼬박 국회에서 가슴을 치며 논의 과정을 지켜봤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일단 쫓아갔어요. 눈을 똑똑히 뜨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이 법을 가로막는지.”

2016년 서울 구의역에서 발생한 스크린도어 사고 이후 법 개정 논의가 나오며 한때 ‘구의역 김군법’으로 불렸던 산안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잠자다 2018년이 저물 무렵에야 아들의 이름을 딴 ‘김용균법’으로 다시 살아났다. 너무 늦은 국회의 조치에 김씨는 분노했다.

“그때 법이 고쳐졌으면 우리 아들은 죽지 않았겠죠. 그래서 제가 나서는 겁니다. 여태까지 이렇게 많은 죽음이 이어졌는데도, 이제껏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니까…. 나라와 국회가 법을 잘못 만들고 기업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둬서, 그래서 우리 애가 죽은 겁니다.”

김씨는 여야가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과 조국 민정수석의 국회 출석 등을 놓고 막판 협상을 벌이다 가까스로 법안 처리를 합의한 것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민 생명을 위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당연히 고쳐야 할 법을 처리하는 건데 아무 상관도 없는 일로 이 중요한 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겁니다. 국민 안전, 생명의 문제에는 여야가 따로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너는 살아야 한다 ”

‘너는 살아야 한다.’ 엄마는 아들의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은 얘기를 했다. 아들이 숨진 이후에야 만나게 된 아들의 동료를 품에 꼭 안고 울었다. “아유 예뻐라. 너라도 살아야 한다.” 아들처럼 젊은 청년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부모에게 늘 살갑던 아들을 잃은 엄마의 바람은 이제 하나다. ‘제2, 제3의 용균이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법이 통과되고 나서, 태안에 다시 와서 아들 사진 앞에서 얘기했어요. 28년간 늘어진 법인데,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용균이 너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게 됐다고…. 그래서 엄마가 너한테 조금은 할 말이 생겼다고. 용균이 네가 좋은 일을 했다고.”

김씨는 지난 20일 열린 국회 앞 기자회견에서 “자식을 잃은 엄마의 원한이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낳을지 보여주고 단죄하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의 원한’은 국회의 법안 처리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엄마의 싸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김씨는 “이제 겨우 첫발을 뗐을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애초 우리가 요구한 것보다 많이 후퇴됐어요. (원청 사업자에 대한) 처벌도 너무 솜방망이고, 벌금도 상한선은 있는데 하한선은 없고….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우리 뜻만 주장했다면 통과가 안됐겠죠. 결국 이렇게 한 발 뗀 것인데, 이제 정부와 국회가 해주지 않는다면 국민이 나서야 한다고 봐요.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든 나의 일, 내 가족, 이웃의 일이 될 수 있잖아요. 무슨 일이 이렇게 생겼을 때 ‘가슴 아프다’ 정도에서 끝내지 말고 우리가, 우리 사회가 죽였다고 생각하고 함께 나서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목숨을 지켜야 합니다.”

다정하고 살가운 아들이었다. 스무살을 훌쩍 넘겼지만 만나면 장난스럽게 볼을 깨물기도, 다가와 엄마 배를 만지기도 했다. 지난 9월 한국서부발전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에 입사한 아들이 집에 온 것은 석달 동안 단 한차례뿐이었다. 4조 2교대로 일했던 아들은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예비군 훈련차 왔다가 첫 월급으로 홍삼과 보습 크림, 비타민을 사서 집에 들렀다. 그게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애교 많은 아들이었어요. 놀 때는 정말 천진난만하고, 엄마·아빠 목소리가 조금만 바뀌어도 무슨 일 있느냐며 걱정해주고….”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 김해기씨가 마른 손으로 연신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난 11일 차마 믿기 힘들었던 소식을 듣고 구미에서 태안으로 달려온 뒤, 부부는 태안에 아예 거처를 마련해 빈소와 서울을 오가고 있다. 슬픔을 추스르기에도 짧은 시간, 거리에서 국회에서 아들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또 다른 ‘용균이’가 나와선 안된다고 소리쳤다. 김미숙씨는 “우리 아들은 그냥 죽은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 애는 나라가 운영하는 공기업에서 인권유린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어요. 나라가 법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방치한 사이 죽은 겁니다. 그러니까 구조적인 살인이 되는 겁니다. 그냥 죽어도 너무 아깝고 억울한데 이렇게 무참하게,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심한 상태로…. 그 원한이 너무 깊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제가 죽을 것 같았어요.”

아들이 숨진 뒤 엄마는 아들이 일했던 작업 현장을 찾았다. 아들이 하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보고 싶었다고 했다. 현장은 김씨가 상상했던 것보다 열악하고 위험했다. “(발전소는) 겉만 번드르르했어요. 옛날 탄광은 무너지면 생명이 위험한 곳이었는데, 우리 아들이 일했던 곳은 문만 열면 위험한 곳이었어요. 생명을 앗아가는 곳…. (설비 점검을 위해) 기계에 머리를 집어넣어야 하고 손을 넣어 사진을 찍어야 했고. 가까이 얼굴을 대지 않으면 탄가루가 날려서 잘 보이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위험한 곳임을 뻔히 알고도 작업 지시를 한 건 (회사가) 우리 용균이 같은 아이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사람 취급 못 받은 아들”

비정규직인 아들처럼, 어머니와 아버지도 비정규직이었다. 아들이 숨진 11일에도 엄마는 야간 근무를 했다. 아들이 회사로부터 받을 불이익을 감수하며 얼굴을 드러내놓고 노조 활동을 한 사실을, 김씨는 아들이 사망한 이후에야 알게 됐다. 김씨의 영정 사진 옆에는 그가 사고 발생 불과 열흘 전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 역시 김씨의 마음을 쓰리게 한다.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했기에,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가 저렇게 나서서…. 많은 생각을 했을 거라고 봐요. 자기가 직접 그 현장을 경험하면서.”

국회 앞에서 ‘위험의 외주화’를 막을 법안 처리를 요구하며, 자신보다 먼저 산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도 만나게 됐다. 세월호 유족들도 만났다. “(용균이가) 이렇게 되고 그분들 만나기 전에 궁금했어요. 그분들은 자식을 잃고 어떻게 사시는지…. 그분들이 먼저 겪었던 힘겨운 날들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서로 아픔을 나눌 수 있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분들 보면서 느낀 거는, 아무리 해도 빈 껍데기만 갖고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나처럼 죽지 못해 살고 있구나. 아직도 감당이 안됩니다.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법이 통과돼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도 앞으로도 그러겠죠.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아들을 잃었다는 그 감정 때문에.”

■“아들이 낸 숙제 하나씩 풀 것”

사고 이후 발인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빈소에는 정치인들이 몰려 왔고, 언론도 주목했다. 누군가 죽고 난 후에야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작업 환경에 관심을 갖는 무신경. 김씨는 그럼에도 세상에 대고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다. 법안 통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이 아닌데 “이렇게 끝나버릴까 두렵다”고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산안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뒤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김용균씨 유족과 만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생전 아들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만나고 싶어했던 대통령에게 마침내 답이 온 것이다. 김씨는 “대통령을 만나고 싶지만, 말뿐인 사과만 받는 자리라면 원치 않는다”고 했다. 유족과 ‘김용균시민대책위원회’는 태안화력 1~8호기의 작업 중단과 철저한 진상규명, 발전소 상시지속업무의 직접고용과 정규직 전환 등에 대한 정부의 책임있는 답변이 나와야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입장이다. 김씨는 “말뿐인 위로와 유감 표명의 자리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떤 것을 바꿀 수 있을지 대통령이 잘 생각해주시고, 일이 잘되도록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한다”며 “그런 의미라면 언제든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아직 ‘아들이 낸 숙제’를 모두 풀지 못한 엄마는 그 답을 알고 있다고 했다. 마치 아들의 유서처럼 남은 사진 속 문구, ‘직접고용 정규직화’가 그 답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아들의 죽음 이전에도 서부발전에서 10년간 12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며 “비정규직은 몇년에 걸쳐 수십가지를 얘기해도 작업 현장이 하나도 고쳐진 게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어야만, 안전하게 일하고 작업을 중지할 권리가 생기고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영정 속 희고 맑은 아들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김씨가 말했다. “어쩌면 우리 사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안 죽어도 될 사람들이 죽었어요. 우리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진작에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아들한테 몇번씩 얘기하고 다짐해요. 아들아, 너와 네 친구들에게 해줘야 할 것들은 아직 아무것도 이뤄진 게 없어. 그렇지만 이 엄마는, 엄마아빠는, 끝까지 노력할게. 그러니까 지켜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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