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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ha in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잘못된 신념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변화시킨다

입력 : 
2018-12-27 11:3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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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프라하. 프라하의 봄 훨씬 이전, 프라하에는 독재와 불의에 대항하던 정신과 의지가 담긴 상징적인 건물이 있었다. 그리스 출신의 형제 선교사 키릴과 메소디우스 두 성인에게 봉헌된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이 그 주인공이다. 성당의 지하실 외부 창에는 총알 자국이 선연하다. 총알 자국 앞에는 항상 꽃이 놓여 있다. 이곳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지배하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레지스탕스 저항의 성지다.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The Man with the Iron Heart)’의 배경도 프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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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정신이 살아 있는 도시, 프라하 체코의 수도 프라하라 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건이 바로 ‘프라하의 봄’이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 공산당 내 개혁파 둡체크가 당 제1서기로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비스탈린화와 민주화’를 내걸며 그 동안 동유럽 공산 국가를 지배하던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다. 또한 공산당 강경 보수파를 숙청하고 검열 제도 폐지 등을 통해 차근차근 민주화 과정을 실행에 옮겼다. 둡체크의 행보에 발맞춰 체코의 문화 인사들도 한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체코의 자유화, 민주화를 촉구하는 ‘2000어 선언’을 내면서 체코의 개혁이 멈출 수 없음을 천명했다. 이 선언에는 설사 개혁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어떠한 무력 행동에도 분연히 맞서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공산주의 맹주국이자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을 위성국으로 지배하던 소련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소련은 바르샤바 동맹을 근거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체코의 민주화 세력에 압력을 가했다. 그럼에도 체코의 민주화가 가파르게 진행되자 소련은 1968년 8월16일 체코에 대한 군사 개입을 결정하고, 4일 뒤 8월20일 소련군을 주축으로 한 바르샤바 동맹군 약 20만 명을 탱크를 앞세워 체코로 진격시켰다. 그리고 둡체크 등 개혁파를 체포, 납치해 그들을 체코 국민과 격리시켰다. 프라하를 중심으로 체코 전역에서 이에 저항하는 운동과 시위가 벌어졌지만 소련은 세계 여론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수십 명이 살해당하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 뒤 사태는 가라앉았지만 소련은 약 7만 명의 군대를 체코에 주둔시켰다.

하지만 체코인의 자유 의지는 꺼지지 않았다. 1969년 카렐 대학생 얀 팔라흐가 분신 자살을 하는 등 대학생, 일반 시민의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탱크와 총의 무자비한 탄압 앞에서도 체코 국민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체코에 민선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프라하의 봄 훨씬 이전, 프라하에는 독재 정권에 대항하던 정신과 불굴의 의지가 담긴 상징적인 건물이 있었다. 그리스 출신의 형제 선교사인 키릴과 메소디우스 두 성인에게 봉헌된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이 그 주인공이다. 성당의 지하실 외부 창에는 총알 자국이 선연하다. 총알 자국 앞에는 항상 꽃이 놓여 있다. 이곳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지배하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레지스탕스 저항의 상징이다. 당시 프라하 총독이던 독일군 특무부대장이며 게슈타포 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곳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시 유일하게 성공한 암살 작전은 그 동안 영화, 소설로 만들어져 수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기억되고 있다. 어쩌면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의 탱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체코 국민들의 용기는 시대정신과 자유 의지의 산물이자 폭력에 대항한 체코인의 뜨거운 유전자인 셈이다.

잘못된 개인이나 집단의 신념과 목적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하다. 영화에서도 등장하지만 히틀러는 무려 12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려 했다. 역사적 가설이지만 만약 그때 하이드리히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의 희생자 수는 몇 배가 되었을 것이다. 수용소에서의 집단 학살 계획을 수립한 하이드리히는 매우 치밀하고 정교하게 인종 청소를 단행했었다. 실제로 하이드리히 암살 직후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이 정밀하게 진행되지 못했다는 정황이 발견된다.

체코에 기독교를 전파한 두 명의 성인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교회에 남아 있는 총알 자국은 보는 이를 숙연케 하는 역사의 흔적이다. 프라하는 수세기 동안 역사적 부침을 거듭하며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했지만 도시 곳곳에는 자유 정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많은 사람들의 피가 뿌려져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 두려움을 떨치고 나설 수 있는 용기, 그것을 저울에 담아 계량화할 수 있다면 그 무게감은 범인들이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만이 행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로의 전진인 것이다. 그 증거가 프라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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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를 조련한 나치 신봉자 부인 프라하 교외의 호화로운 성, 아이들이 아버지와 뛰논다. 하늘에는 비둘기가 날고 분수의 물이 정원을 적신다. 평화로운 전경 한가운데 부츠를 신은 군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나치의 상징 ‘하켄 크로이츠’ 즉 철십자 휘장을 단 군복을 입은 하이드리히의 모습이 거울에 드러난다. 하이드리히는 오픈카를 타고 경호병 한 명 없이 성에서 나와 프라하의 집무실로 간다. 프라하의 분주한 아침을 뚫고 마치 ‘아무도 나를 건드릴 자가 없다’는 오만을 표시하며. 그 순간, 한 레지스탕스가 하이드리히의 차를 막고 기관총을 겨눈다. ‘철컥’, 불발이다. 그렇게 화면은 사라진다.

1929년 독일의 킬 해군 기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제이슨 클락)는 야망에 불타는 젊은 해군 장교다. 그는 바이올린, 피아노 연주를 즐기고 펜싱 실력도 수준급이다. 기차역. 하이드리히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크리스티나 베겔이다. 베를린에서 하이드리히를 만나러 온 그녀. 두 사람은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과연 그녀는 하이드리히의 욕망을 채워 줄 수 있을까.

무도회장. 하이드리히를 유심히 지켜보는 눈이 있다. 리나(로자먼드 파이크)다. 그녀는 몰락한 명문가의 딸이다. 리나와 하이드리히는 한눈에 서로의 야심을 알아본다. 두 사람은 왈츠를 춘다. 극장, 영화를 보는 하이드리히의 손을 리나가 먼저 잡는다. 리나는 하이드리히의 능력을, 하이드리히는 리나의 배경을 인정한다. 기차 안, 리나는 하이드리히를 데리고 자신의 옛 영화가 깃든 집으로 향한다. 리나는 하이드리히에게 나치 당원증을 보여 준다.

“리나, 조국은 지금 힘이 없다.”

“그 분이 바꿔 주실 거예요. 그 분이 쓴 책을 읽어 봐요.”

“그 분? 그래, 무슨 책?”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읽어 봐요.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는 매일 파티가 열렸어요. 사람도, 음식도 풍부하고. 파티가 끝나면 어머니는 나를 찾았는데 나는 피아노 밑에 숨었지요. 당신이 그때를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이드리히, 나의 꿈은 다시 그때처럼 사는 거예요.”

결혼을 약속한 하이드리히와 리나. 하지만 하이드리히에게 청천벽력의 소식이 날아든다. 크리스티나 베겔이 하이드리히를 성적 유린으로 고발한 것. 군 법정에 선 하이드리히는 유죄를 선고받는다. 그의 야심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이드리히는 광분한다. 거울을 깨고, 집기를 부수고,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그때 리나가 들어온다. 리나는 하이드리히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한다. “남자답게 굴어요. 울지 말고. 우리 미래를 이야기해요. 내 남편이 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딱 한 가지만 약속해요. 다시는 그 여자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요.” 리나와 하이드리히는 결혼식을 올린다. 리나는 인맥을 이용해 하이드리히의 군 복직과 출세를 돕는다. 하이드리히가 나치당에 가입하자 리나는 나치당의 실력자이며 히틀러의 심복인 SS친위대 사령관 힘러와 하이드리히의 만남을 주선한다. 하이드리히에게는 기회의 순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위대 보안부를 맡을 사람이지. 그래야 정적의 비밀이나 정부 기관에 숨어든 외부 세력을 파악할 수 있거든. 자네의 정보에 대한 철학을 듣고 싶군.”

“정보는 직감과 지식의 결합입니다. 그리고 정보 조직은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저는 열의가 있습니다. 오면서 힘러 각하의 양계장을 보았습니다. 6개의 닭장에 150마리의 닭이 있는데 여우가 드나들더군요. 양계장의 일꾼이 비만이던데, 그러면 당연히 관리를 할 수 없습니다. 효율은 관리와 규모의 경제학입니다. 만약 저에게 양계장 운영을 6개월만 맡겨 주신다면 닭은 70배, 수익은 10배로 증대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친위대를 맡겨 주십시오.”

히틀러는 독일을 완전히 장악했다. 나치의 세상에서 하이드리히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공산주의자, 반나치주의자, 히틀러의 정적을 잔인하고 냉정하게 제거한다. 그는 정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히틀러는 그를 신임한다. 그리고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에게 우생학을 근거로 유전자의 순수성을 주장한다. 유대인 숙청의 논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에서 보여 준 하이드리히의 과감성을 높이 산다. 그리고 하이드리히에게 별명을 붙여 준다. 바로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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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힘러, 도살자 하이드리히 파티장. 독일군 장성들 사이에서 반라의 여성들이 웃음을 흘린다. 장군 한 명이 방 안에 들어가자 미모의 여성이 따라 들어간다. 거울에 비친 방 안의 모습. 거울 너머에 누군가 있다. 바로 하이드리히다. 그는 비밀스런 섹스 파티 등에서 독일군 장군들의 약점을 확보한다.

하이드리히의 이른바 ‘인종 청소’ 작전에는 수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하이드리히의 특무부대만으로는 완벽한 작전이 어렵다. 하이드리히는 독일군 장군에게 독일 정규군의 협력을 요청한다. 장군은 단칼에 거절한다.

“장군님이 베를린 매춘 업소를 드나드는 창녀 애호가라는 사실을 밝힐 수도 있습니다.”

“음, 국방군이 수집한 반대파의 정보를 주겠네. 그리고 병력을 지원하겠지만 대신 청소가 시작되면 정규군은 떠나겠네.”

하이드리히의 인종 청소는 속도가 붙는다. 사형장. 한 병사의 총이 발사되지 않는다. 병사에게 다가가는 하이드리히. 그는 너무 쏘아서 총이 과열되었다는 병사의 말에 권총을 내준다. 수십 만의 유대인, 집시, 공산당원들이 하이드리히가 지휘하는 특무부대의 총에 쓰러졌다. 1941년 독일 점령하의 체코 프라하. 히틀러의 신임을 얻은 하이드리히는 보헤미아-모라비아 총독으로 취임했다. 프라하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하이드리히. “앞으로 유대인은 모두 경찰서에 자진 신고해야 한다. 그리고 레지스탕스는 즉시 해체하라. 이를 어길 시 향후 어떠한 자비도 없을 것이다.”

하이드리히는 베를린과 빈 사이에 있는 프라하를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이 없는 첫 번째 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유대인 학살 부대를 동원해 피의 살육 작전을 펼친다. 남성은 사형장으로, 여성과 아이는 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다. 하이드리히는 베를린에서 열린 반제회의에서 무려 1200만 명의 유대인 학살 계획을 밝힌다. 그야말로 ‘인간 도살자’인 것이다.

런던의 체코 망명 정부는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을 준비한다. 얀 쿠비스(잭 오코넬)와 요제프 가브치크(잭 레이너)가 선발되었다. 6개월 훈련을 거친 두 사람은 체코에 잠입한다. 두 사람은 체코의 레지스탕스인 ‘쓰리 킹즈’와 접선해 협력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얀은 안나 노박(미아 비시코프스카)과 연인처럼 행동하며 프라하 시내 아지트에 몸을 숨긴다. 그 무렵, 하이드리히는 잠입한 병사의 목적과 행선지를 찾으려 레지스탕스는 물론이고 체코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을 지시한다. 이에 쓰리 킹즈 중 두 명이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숨지고 모라베크만 남았다. 얀과 요제프는 모라베크와 접선한다. 모라베크는 이들에게 작전을 설명한다.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청산가리도 준비한다. 준비가 되면 작전 후 탈출 계획을 알려주겠다.”

얀과 요제프를 비롯한 대원들은 하이드리히의 암살 장소를 정한다. 도시 외곽의 커브 길. 자연스럽게 자동차의 속도가 줄어드는 지점에서 요제프가 기관총을 쏘고, 이후 얀이 수류탄을 던진다. 그리고 각자 도주해 거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러면 모라베크가 준비한 탈출 계획대로 체코를 떠나면 된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특무부대가 모라베크의 거처를 알아냈다. 독일군에게 체포되는 순간 자살하는 모라베크. 이 모습을 요제프가 지켜보았다. 이제 탈출 계획은 무산된 것이다.

아지트에 모인 얀과 요제프, 발차크, 추르다 등의 대원들. 런던의 지시를 기다린다. 런던 망명 정부는 탈출 계획이 없어졌고 설사 하이드리히를 죽여도 그 몇 배의 피의 보복이 두려워 암살 작전을 취소한다. 추르다를 비롯한 몇몇 대원들도 “모라베크가 죽는 순간 작전은 취소된 것이다”라며 작전 실행을 반대했다. 하지만 얀은 “나치 중 단 한 명도 암살 당하지 않았다. 레지스탕스로서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하이드리히는 죽어 마땅한 인물이다. 작전을 실행하자”고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요제프, 발차크가 찬성했다. 6인의 특수 부대원들은 “체코를 위하여”를 외치며 작전 실행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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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저항한 자유 정신 1941년 5월 27일, 하이드리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픈카를 타고 출근한다. 자동차는 프라하 시내로 접어들었다. 커브 길에서 속도를 줄이는 순간, 요제프가 정면에서 기관총을 사격했다. 하지만 불발이다. 요제프는 총을 집어 던지고 급히 도주했다. 운전병은 도주하는 요제프를 뒤쫓는다. 그 순간, 홀로 서 있는 하이드리히의 승용차에 수류탄이 터진다. 얀이 던진 것이다. 하이드리히는 몸을 가누고 얀에게 권총을 발사한다. 도주하는 얀. 몇 걸음 얀을 뒤쫓던 하이드리히는 길에 쓰러진다.

하이드리히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다. 베를린에서 급파된 독일 최고의 의사들이 그를 치료했지만 하이드리히는 폭탄 파편에 맞은 상처 부위의 염증이 가라앉지 않고 폐렴, 패혈증으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프라하에 비상계엄이 내려졌다. 하이드리히 암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격노하고 범인을 생포하라고 지시했다. 프라하 시내의 모든 집에 독일군이 들이닥쳤다. 얀과 요제프, 발차크 등 6인은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으로 몸을 숨겼다. 나치는 대학살을 자행했다. 특수부대원이 도착한 지역의 마을은 통째로 없어졌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체코 남성은 모조리 잡혀 들어갔다. 나치는 회유책을 썼다. 방송으로 “암살단의 거처를 밝히는 사람은 죄를 묻지 않겠다. 하지만 끝내 그들을 숨겨 주었다가 발각되면 가족 모두를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일주일 뒤인 6월 4일, 리나와 힘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이드리히는 결국 죽었다. 하이드리히는 죽기 직전 힘러에게 서류를 주었다. 히틀러에게 전해 주라고. 그 서류의 제목은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 그리고 리나에게 유언을 남겼다. “리나, 우리 아이들을 훌륭한 아리아인으로 잘 키워 줘. 오페라 작가였던 아버지가 쓴 글이 생각나네. 세상은 손풍금이라네. 신이 손잡이를 돌리면 우리 모두 그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지. 그들을 춤추게 하세요.” 히틀러가 신임하고 힘러의 두뇌였던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 하이드리히는 38세에 죽음을 맞았다.

추르다가 흔들렸다. 그는 고심 끝에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친위대 본부로 들어가 동지들이 성당에 숨어 있다고 밀고했다. 성당에 독일군이 밀어닥쳤다.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인해 전술로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얀과 요제프는 성당 지하로 피신했다. 1층에서 저항하던 발차크 등 4인은 모두 전사했다. 독일군은 두 부대원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들은 지하실을 발견했다. 얀과 요제프는 곡괭이로 지하의 두꺼운 벽을 부수기 시작했지만 벽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독일군은 두 사람을 생포하기 위해 살수차를 동원해 물을 쏟아 부었다. 서서히 차오르는 물. 발목, 무릎, 허리, 가슴, 이제 목까지 물이 차 올랐다. 얀과 요제프는 서로를 바라본다.

“친구, 우리 저쪽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너한테 내가 있고, 나한테 네가 있는 거야. 우리는 같이 가는 거야.”

두 사람은 각자 머리에 총을 겨눈다. 그리고 동시에 총성이 울리며 얀과 요제프는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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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프라하를 향한 잔인한 복수 영화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는 히틀러가 총애한 프라하의 학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유대인 대학살을 막기 위한 체코 레지스탕스의 목숨을 건 작전 수행을 그린 전쟁 실화다. 프랑스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25개국에 출간된 소설 ‘HHhH’를 원작으로 한 세드릭 히메네즈 감독 작품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암살 작전이란 점과 레지스탕스의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최후가 극적인 소재라 1976년 ‘새벽의 7인’, 2016년 ‘앤트로포이드’, 2017년 ‘HHhH’ 등으로 영화화되었다.

‘새벽의 7인’ 등의 작품에서는 주로 레지스탕스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세드릭 히메네즈 감독은 나치 친위대의 두뇌 역할을 했던 하이드리히에 이야기를 집중했다. 유대인 말살 계획인 ‘최종 해결책’의 설계자였던 하이드리히는 ‘힘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고 불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히틀러, 힘러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다. 하이드리히 못지않게 주목할 인물은 몰락한 귀족 출신인 아내 리나. 나치당 신봉자인 리나는 자신의 권력욕을 남편에게 투영했고 그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나치와 하이드리히의 만행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체코 레지스탕스는 암살 작전을 거행했고 이는 나치 체제를 약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영화는 평범한 개인이 학살의 주도자로 변모하는 과정, 잘못된 신념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에 주목한다.

영화는 믿음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나치의 악함과 부당한 권력에 도전하는 레지스탕스의 용기를 통해 이데올로기와 신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상황이 힘들다는 이유로 야만성이나 잔혹함을 받아들이고 핑계 삼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암살 작전의 역풍은 거셌다. 하이드리히의 사망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마치 아들을 잃은 것처럼 오열했다. 그리고 피의 보복을 자행했다. 얀과 요제프가 체코에 잠입하기 위해 낙하산으로 내린 리디체 마을은 완전히 지도에서 사라졌다. 성인 남성 200여 명은 모조리 학살되었고, 여성과 어린아이는 강제 수용소에 보내진 후 죽음을 맞이했다.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독일의 보복은 그해 여름 내내 지속되어, 체코의 민족주의자들과 전직 군인, 지식인, 공산주의자 등 1500여 명이 살해당했고, 체코 유대인 3000명이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베를린에서는 분노한 독일인들이 150명의 유대인을 길거리에서 무참히 때려죽이기도 했다. 또한 독일의 잔인한 보복은 모든 망명 정부의 저항 운동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원래 에드바르트 베네시 체코 망명 정부 대통령은 하이드리히 외에 나치에 협력한 전직 체코군 장군 임마누엘 모라벡과 하이드리히의 후임자 칼 헤르만 프랑크도 암살할 계획이었지만 독일의 끔찍한 보복을 목격한 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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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보석이자 카를 4세의 완성품 영화의 배경은 유려한 풍광의 프라하다. 중세 시대 유럽의 고풍스런 모습을 간직한 프라하는 ‘동유럽의 보석’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 영화는 그중에서도 비극적인 최후의 장소인 성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을 그대로 보여 준다. 블타바 강변 레슬로바 거리에 있는 성당의 지하실 외부 창에는 지금도 전사들을 추모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체코인에게 이곳은 불의와 폭력에 대항한 숭고한 저항 정신의 ‘성지’인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안토닌 드보르자크,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등 유명한 작가와 음악가의 고향 프라하는 체코 중서부에 위치한 역사의 도시이다. 또한 10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스바티이르지 교회,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성 비투스 대성당, 바로크 양식의 발트슈타인 궁, 로코코 양식의 골즈 킨스키 궁을 비롯해 다양한 건축물과 함께 ‘100개의 뾰족탑을 가진 도시’로 불리는 프라하는 유럽의 그 어떤 도시보다 유산이 풍부하다.

이곳에 동유럽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슬라브족이 들어와 정착한 시기는 약 5세기경이다. 그 뒤 9세기 무렵 성을 쌓고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다. 프라하가 동부 유럽의 중심이 된 것은 14세기 체코의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손꼽히는 카를 4세 때다. 지금의 체코인들이 ‘체코의 아버지’라 존경하는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보헤미아 왕, 로마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이탈리아 왕, 부르군디 왕을 겸임한 거의 ‘직업이 왕’인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체코를 정치 경제적으로 부흥시켰고 융성한 문화를 꽃피웠다. 중부 유럽 최초의 대학을 설립했고 수도로서 프라하의 위용을 갖추었다. 유럽의 변방이었던 지역적 불리함와 슬라브족을 무시하던 서유럽의 여러 국가도 카를 4세 때의 프라하는 빈, 파리, 런던과 함께 유럽의 중심지로 인정할 정도였다.

카를 4세는 어릴 때는 프랑스 궁정에서 생활했다. 그의 삼촌이 바로 프랑스의 샤를 4세. 그는 이곳에서 세련된 프랑스 왕실 문화는 물론이고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을 익혔다. 그가 유럽의 변방 왕실 출신에서 주목할 만한 실력자가 된 계기는 교황 클레멘트 6세와 독일 왕 루트비히 4세의 대결에서 교황을 지지한 선택 때문이다. 당시 다수의 성직자, 제후들이 루트비히를 지지했지만 카를은 세가 약한 교황을 지지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 ‘도박 같은 신심’은 1347년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고 그의 후계를 이은 군터가 1349년 사망하면서 기회가 되었다. 선출직이던 독일 왕에 카를이 즉위한 것이다. 이 무렵 유럽은 흑사병이 휩쓸었다. 카를은 흑사병이 전염되지 않은 보헤미아 프라하 제국의 수도인 프라하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프라하를 새롭게 건설했다. 신시가지를 계획하고 각종 건축물을 올렸다. 카를은 프라하를 동유럽의 파리로 만들 생각이었다.

카를은 매우 영리한 국왕이었다. 그는 1349년 대관식을 올리면서 당시 유럽 최대, 최고의 왕가인 합스부르크 출신 왕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정략 결혼이었지만 카를의 지위는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카를은 알프스를 넘었다. 이탈리아로 간 그는 밀라노의 성 암브로스 바실리카에서 롬바르디 왕 대관식을 올렸고 곧바로 로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대관식도 올렸다. 물론 클레멘트 교황에게 충성을 다짐했고 교황 또한 카를을 지지했다. 카를은 교황의 지원과 왕의 지위를 이용해 라인강 일대를 장악하며 체코를 유럽의 최강 국가로 변모시켰다. 이 무렵 프라하는 정치 권력의 중심지이며 유럽의 생산 기지 그리고 학문의 도시로서 그 명성을 떨쳤다. 이후 프라하는 정치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대 공업 도시로서의 명맥은 유지했다. 카를 4세는 1378년 그가 이루어 놓은 번영의 도시 프라하에서 숨을 거두며 아들 바츨라프에게 후계를 물려주었다. 그 뒤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체코는 1918년 독립하며 프라하를 수도로 정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지배를 받았고 그 이후 공산 정권이 들어서며 1989년까지 모스크바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지만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로서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프라하에는 카를 4세의 유산이 곳곳에 남아 있다. 카를교와 각종 성당도 있지만 프라하의 명물은 누가 뭐래도 시계탑.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이 시계탑은 두 개의 원반으로 시간을 나타내고 그 옆에는 네 개의 조각품, 그리고 그리스도 12사도를 의미하는 시계 알림이 있다. 이 광장에는 얀 후스의 동상이 서 있다. 15세기 종교 개혁자인 그는 가톨릭의 타락을 비판하며 개혁을 주장하다 교회에서 파문 당하고 이단자로 몰려 화형 당한 성인이다. 그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향하라”고 외치며 진정한 교회와 믿음을 전파한 인물이다. 이처럼 프라하에는 부패한 절대 권력, 그릇된 신념의 정파, 독재와 폭력에 대항한 체코인의 ‘자유 의지’가 곳곳에 남아 있다. 키릴 메소디우스 성당 외벽의 처절한 총알 자국이 바로 그 증거다.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위키피디아, Daum영화, 포토파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60호 (19.01.0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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