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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This is America] 태양이 떠오르자…수십만개 돌기둥은 神의 궁전이 되었다

입력 : 
2018-12-24 04:01:06
수정 : 
2018-12-24 10: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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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유타주 브라이스 캐니언
사진설명
브라이스 캐니언은 다른 협곡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역사도 짧은 편이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브라이스 캐니언만큼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곳은 없다.
애리조나주의 그랜드 캐니언, 유타주의 자이언 캐니언과 브라이스 캐니언을 두고 흔히 미국 서부의 3대 캐니언이라고 일컫는다. 거대한 지층대 그랜드 스테어케이스(Grand Staircase)에 차례대로 자리하며 지구가 지나온 20억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브라이스 캐니언(Bryce Canyon)은 지층 최상부를 형성하는 가장 젊은 협곡이다. 다른 협곡에 비하면 규모가 크지도 역사가 오래되지도 않았지만 브라이스만큼 섬세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브라이스 포인트 전망대에서 협곡과의 첫 만남을 준비한다. 새까맣던 하늘이 점차 분홍빛 여명으로 물들자 오묘한 빛깔의 사암 첨탑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태양이 하늘을 향해 기어오를수록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원형극장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공간, 군중처럼 그곳을 가득 메운 수십만 개의 돌기둥, 그 사이사이에 내려앉은 하얀 눈과 푸른 숲의 대비는 마치 신이 빚은 궁전을 보는 듯 찬란하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협곡으로 불리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협곡이 아니다. 강에 의해 형성된 다른 협곡과는 달리 이곳은 폰소건트 고원(Paunsaugunt Plateau)이 침식돼 형성된 원형 분지기 때문이다. 호수 바닥이 융기해 고원이 되었고 사이사이에는 빗물이 스며들었다. 1년에 200일 이상이 영하를 밑도는 고원의 혹독한 기후는 빗물을 동결하고 융해하기를 반복하며 땅의 틈새를 벌렸다.

거대한 대지가 바람에 깎이고 홍수에 쓸리고 비에 조각되기를 수천만 년. 기기묘묘한 모습의 사암 기둥, 후두(hoodoo)가 탄생했다. 그러니까 브라이스 캐니언은 억겁의 시간이 흘린 눈과 비를 머금고 자란 천연 첨탑의 고향인 셈이다. 브라이스 캐니언을 이루는 주요 지층은 중생대와 신생대에 퇴적된 클라론 지층(Claron Formation)이다. 장밋빛과 상앗빛을 띠어 분홍 절벽(Pink Cliff)으로 불리기도 한다. 브라이스 캐니언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빛내는 신비로운 색채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다.

브라이스 캐니언은 1923년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가 5년 후인 1928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브라이스 캐니언이라는 이름은 초기 모르몬교도 개척자인 에비니저 브라이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브라이스 캐니언에는 총 13개 뷰 포인트가 형성돼 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단연 공원 심장부에 위치한 앰퍼시어터(Amphitheater) 구역이다. 브라이스 캐니언의 독특한 계단식 분지 지형과 기상천외한 후두의 모습을 가장 아름다운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다.

하나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나바호 트레일'과 '퀸스 가든 트레일'을 걷는 일은 브라이스 캐니언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가파른 절벽길을 따라 신의 궁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중심에 우뚝 솟은 토르의 망치(Thor's Hammer), 수백 명의 사제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듯한 사일런트 시티(Silent City)를 비롯한 후두의 절경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나바호 트레일의 백미 월스트리트(Wall Street) 구간도 빼놓을 수 없다. 빌딩 숲에 쌓인 뉴욕의 월가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양쪽으로 솟은 거대한 적벽과 조각상처럼 늘어선 사암 기둥의 웅장함은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경이롭다. 분지의 바닥에 다다르면 적요의 세상이 펼쳐진다. 새하얀 눈밭 위로 푸른 잎사귀가 가득한 유타 향나무와 폰데로사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룬다. 바깥 세상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브라이스의 아름다움이다.

[글·사진 = 고아라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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