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향기, 그 음악…감각을 통해 잊었던 과거와 연결되는 나

백수린 소설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 277쪽 | 1만원

[책 굽는 오븐]그 향기, 그 음악…감각을 통해 잊었던 과거와 연결되는 나

저는 여름보다는 겨울을 더 사랑합니다. 기온이 낮아도 햇빛이 쨍한 그런 날에는 뺨 위에 닿는 공기가 기분 좋게 차갑고 정신이 맑아지죠. 겨울은 오감 중에서 후각이 더없이 예민해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목도리로 턱밑까지 감싸고 어깨를 웅크린 채 겨울의 거리를 한참 동안 걷다가 지하철역사 안으로 들어서는데 어묵꼬치와 군고구마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얼어붙은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데워줄 것 같은 냄새가 온기처럼 다정하게 몸을 감쌌어요. 그러자 이제는 맡기 힘들어졌지만 스무 살 무렵, 아르바이트하러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탈 때마다 저를 유혹하던 델리만쥬의 달달한 향과 함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일제히 떠올랐습니다.

나는 누구고 어떤 식으로 살아나가야 할까를 몰라 고민하던 이십대 초반, 제가 좋아했던 작가들은 정체성의 문제를 즐겨 다루는 소설가들이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인 파트릭 모디아노도 그중 하나였어요. 그의 소설들에는 잃어버린 과거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인물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공쿠르상을 수상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기 롤랑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에요. 기억을 잃은 후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던 주인공은 한 장의 사진과 조악한 단서들을 토대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진술은 모두 부정확하고, 기 롤랑이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해나가려 노력하면 할수록 그의 진짜 과거가 무엇인지는 점점 더 모호해집니다.

[책 굽는 오븐]그 향기, 그 음악…감각을 통해 잊었던 과거와 연결되는 나

충분히 달콤하고 부드러운 줄 모르고 혹시 인공의 바닐라향을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던 스무 살. 그때는 스스로 “한낱 환한 실루엣”(9쪽)에 불과하다고 느끼던 기 롤랑에 매료되곤 했죠.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시간이 과거를 망각의 어둠 속으로 침몰시키더라도 감각의 형태로 각인된 기억들은 살아남아 현재의 우리가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였습니다. 어둠에 매혹된 사람처럼, 망각된 과거를 향해 더듬더듬 나아가는 기 롤랑이 조금씩이라도 존재로서의 두께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빈곤한 증거들이나 불확실한 타인의 말들 때문만이 아니라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수 냄새나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 소리 같은 것들이 순간적으로 타올랐다 꺼져버리는 조명탄처럼, 어둠 속에 파묻힌 기억들을 잠시 비추기 때문이에요.

개찰구를 지나자 한 시절의 풍경을 눈앞에 잠시 펼쳐놓았던 냄새들은 다시 아득히 멀어졌습니다. 냄새처럼 흩어져버린 그 시절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제는 지하철역에서 보기 힘들어진 델리만쥬처럼 그 시절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열차가 들어오면 저는 인파에 휩쓸리는 것에 지친 얼굴로 또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테죠. 어깨에 닿는 감촉이나 누군가의 냄새 같은 것이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 미래의 저를 언제고 다시 이 순간으로 불러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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