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영국의 날씨와 예술, 그 미묘한 상상력

문학수 선임기자

예술가들이 사랑한 날씨

알렉산드라 해리스 지음 | 강도은 옮김

펄북스 | 732쪽 | 4만2000원

[책과 삶]영국의 날씨와 예술, 그 미묘한 상상력

영국인들이 사랑하는 화가 윌리엄 터너는 ‘빛의 화가’로 불린다. 프랑스의 인상주의보다 50년쯤 앞선 시기에 그는 이미 빛에 탐닉했다. 영국중앙은행 발표에 따르면 2020년부터 통용되는 20파운드 지폐에 그의 얼굴과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전함 테메레르’가 등장할 예정이다. 1838년 어느날, 템스 강가에서 산책하던 터너가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전함 테메레르가 증기선에 예인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린 그림이다. 완전히 빛에 용해된 풍경이다. 이렇듯이 터너는 빛을 중심으로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날씨’에 주목했다. 1828년 그린 ‘펫워스 대정원’은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를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표현했다. 1828년에 그렸다가 1837년 개작한 ‘레굴러스’는 화폭의 정면에서 치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실 정도다. 1844년 작품인 ‘비, 증기, 그리고 속도’는 말할 것도 없다. 비 오는 날씨 때문에 햇살은 구름 뒤에 숨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너의 그림은 여분의 햇살과 안개, 바람, 물, 달리는 증기기차의 속도까지를 화폭에 용해시켰다.

터너가 활약했던 빅토리아시대의 사람들은 태양을 사랑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인들에게 태양은 “커튼이나 책을 퇴색시키고, 몸으로 침입해 들어와 목이나 이마를 붉게 만들고, 두통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커튼이나 가림막으로 태양을 가렸고 양산을 펼쳤다.” 하지만 터너는 달랐다. 그는 “양동이에 가득 담긴 노란 물감에 집착하면서 빛을 추구”했으며, 그림마다 미묘하게 다른 노란색을 끊임없이 구사했다. “영국의 날씨를 새로운 심미안으로 바라보는 풍경화”는 그에게서 막을 올렸다고 할 수 있다.

‘빛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1844년작 ‘비, 증기, 그리고 속도’.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빛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1844년작 ‘비, 증기, 그리고 속도’.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이 책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예술과 날씨에 대해 서술한다. 저자인 알렉산드라 해리스는 영국 버밍엄대학 영문학 교수인데, 서술의 범위를 유럽 전역으로 확대하지 않고 본인의 고국인 영국으로 제한했다. 한마디로 표현해 영국의 날씨와 예술가들이 어떻게 미묘한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살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날씨에 대한 예술가마다의 시선, 혹은 태도에 관한 책으로도 읽힌다.

누구에게나 날씨는 기억에 아로새겨진다. 올해 37세의 여성인 저자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이 웨스트 서섹스의 콜트월 섬에서 자랐다고 술회한다. 영국에서는 남쪽에 속하지만 그래도 추운 곳이다. 그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16세기에 지어진 탑에서 겨울 휴가를 보내다가 “지독한 습기와 추위”에 깨어나 “사백년 전, 백년 전, 이십년 전에 이 방에서 지냈던 사람들도 나처럼 심한 추위를 느꼈을까 궁금해졌다”고 말한다. 도시의 난방 속에서 지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추위에 몸을 떨었던 그 경험이 이 책을 쓰도록 이끌었다는 고백이다.

저자는 “영국 문학은 추위에서 시작했다”고 말하면서 8세기나 9세기쯤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애가 ‘방랑자’를 언급한다. 고향에서 쫓겨나 얼어붙은 바다 위를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이야기다. 이 앵글로색슨 방랑자는 여럿이 둘러앉은 난롯가의 온기를 그리워하면서도 찬바람이 쌩쌩 휘몰아치는 바깥세상에 매혹을 느낀다. “물과 얼음과 눈으로 가득한 바다를 배경으로” 깃털을 활짝 펼치고 목욕하는 바닷새를 노래하면서 “추위의 미학으로 우리를 이끈다”.

날씨를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다. 햇살, 비, 바람, 구름, 안개, 눈보라, 폭풍우, 천둥, 번개, 홍수, 가뭄 등 우리는 어떻게든 매일 날씨를 겪는다. 또한 날씨란 모두 같이 체감하는 것인 동시에 사람마다 제각기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책에 따르면 영어로 ‘Bloody cold!’, 우리말로 ‘얼어 죽겠어!’는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1713년에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에서 “집 끝에 몇 그루 왜소한 전나무들이 심하게 휘어지는” 모습을 통해 바람을 묘사했다. 시인 퍼시 셸리와 평론가 존 러스킨은 구름을 사랑했다. 셸리는 “구름 속에 녹아들고 싶다”고 했고, 러스킨은 “자기 시대의 날씨를 끈질기게 읽어낸 가장 헌신적인 해석자”였다. 그가 1843년 출간한 <근대 화가론>은 ‘구름의 진실’ ‘구름 무리’ ‘균형이 잡힌 구름’ ‘구름 전차’ 등의 소제목으로 이뤄진, “수백 페이지의 엄청난 기록”이다.

사람의 기분은 날씨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평소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게르망트 쪽>이라는 소설에서 “어느 날의 아침 날씨가 화자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1928년에 버지니아 울프가 쓴 소설 <올랜도>는 “대기의 변화를 묘사함으로써 서로 다른 세기를 살아가는 영국인들의 삶과 분위기”를 그려냈다. 이 소설은 한밤중에 벼락이 계속 내려치고 검은 구름이 런던을 완전히 뒤덮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18세기는 끝났고 19세기가 시작됐다”고 선언한다.

날씨를 대하는 예술가들의 갖가지 태도, 또 날씨가 그들의 작품에 미친 영향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중세에서 시작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등장한다. 주로 다루는 장르는 문학이며 미술이 간간이 곁들여진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1998년 타계한 시인 테드 휴즈, 지난해 세상을 떠난 화가 하워드 호지킨과 그의 작품 ‘비’, 지금도 왕성한 필력을 구사하는 72세의 작가 줄리언 반스 등이 언급된다.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인물이 등장해 현란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영국의 예술을 한 걸음 더 이해하게 하는 교양서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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