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구정은 지음
후마니타스 | 392쪽 | 1만7000원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소멸시킨다. 자연의 이치다. 문제는 과할 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또 이를 금세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갖다 버린다. “곁에 두고 쓰던 물건은 물론이고 시간과 공간도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 무덤이, 공원이, 때로는 도시 자체가 버려”지고 있다.
책은 ‘남겨진’ ‘버려진’ ‘사라진’ ‘보이지 않는’ 네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오랜 시간 국제부 기자로 활동한 저자가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느낀 점을 글로 풀어냈다. 이야기는 이라크 바빌론 유적지에서 시작한다. 문명이 시작된 곳에서 저자가 본 것은 인류의 위대함이 아니라 잔혹함이다. “101개 왕조가 명멸해 간 바빌론의 역사에서 ‘사담’과 ‘미군정’은 스쳐 지나가는 이름에 불과”함에도, 짧은 시간 많은 것을 파괴했다. 탱크 바퀴와 폭약 연기는 지난한 역사를 고려할 이유가 없다.
책은 도시에서 습관처럼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흘러간 바다의 모습도 비춘다. 남태평양 섬나라 나우루에서 저자가 느낀 것은 ‘낭만’이 아니라 ‘물에 빠진 쇳가루처럼 가라앉는 앙금 같은’ 회한이다. 책은 “물새의 90퍼센트는 배 속에 플라스틱이 있다는 충격적인 수치도 있다”며 “비닐봉지를 덜 쓰는 등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서 저자는 “가장 큰 역설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폐기되는 것 중 하나가 ‘사람’”이라고 썼다. 국제 뉴스의 흔한 가십거리인 ‘중국의 한 자녀 정책’ 뒤에는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평생 학교도 병원도 갈 수 없는 소녀의 삶이 실재한다. 필요한 순간에만 고용돼, 일회용품처럼 버려지는 ‘크리넥스 노동자’는 나 혹은 가족, 친구의 일이 된 지 오래다. 세상은 난민, 이주민이라는 이름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간을 구분 짓는다. 책은 존재하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폐기하며 사는 사이, 어쩌면 우리 스스로 ‘인간’이라는 이름을 지워나가고 있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