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고통의 곁에 ‘곁’을 구축하라

김유진 기자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지음

나무연필 | 304쪽 | 1만6500원

[책과 삶]고통의 곁에 ‘곁’을 구축하라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말한다. “부정적이라고 여기며 억압받던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터져 나오고, 없는 것으로 여기며 속으로 곪아가던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서다.

2018년을 돌아보면, 실로 공감이 가는 진단이다.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부터 상사나 고객, 대기업 자본의 ‘갑질’ 폭로까지, 사회 전반에 약자들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예전 같으면 쉬쉬했을 이야기들이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바깥으로 알려졌다. 여론도 그때마다 들썩였다. 대다수는 함께 울고 분노했지만, 더러는 ‘피해자다움’의 잣대를 들이밀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올 해 한국 사회에 넘실댄 고통의 목소리들은 두 가지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 지금 현실을 구성하는 ‘고통’의 수준이 임계점을 넘어섰고, 그래서 어떻게든 당사자들이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것. “이제 고통을 겪는 이들이 고통이 없는 것은 ‘정상 상태’가 아니라고, 고통은 늘 상존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초 값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좋은 전환이다.”

그런데 엄기호는 이런 상황을 “불길하다”고 말한다. 어째서일까. “우리 사회는 오로지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참의 전시를 통해서만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잊힌 존재가 되어버린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존재감이 전혀 없는 유령이 되어 이 사회를 배회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고 전시하는 사회·경제적 메커니즘을 문제 삼는 것이다. 감동을 자아내는 역경 극복담만큼이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경험은 ‘장삿거리’가 되어버렸다. 개그 프로그램은 아직도 소수자에 대한 조롱을 유머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고통의 ‘곁’에 선 이들이 맞닥뜨리는 고통이다. 엄기호는 “(당사자들이)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의 고통을 전시하며 주문을 외우는 동안 곁은 빠르게 파괴된다”고 말한다. 사례로 등장하는 재희 어머니는 누구보다 정력적인 삶을 살며 가족을 중산층에 진입시켰지만, 일흔 이후에 각종 노인성 질환에 시달리며 가족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재희와 가족들은 어머니의 반복적인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지만, 어머니는 걸핏하면 “너넨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는 말을 한다. 비슷한 말을, 인권 참사 현장에서 피해자들 옆에 있는 가족들이나 활동가들도 종종 듣는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단속사회> 등에서 우리 사회의 속살을 예민하게 통찰해온 엄기호는 신작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고통이 “이 사회의 정치이자 경제”가 되어버린 과정을 분석한다. 고통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현상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기성 언론들에 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를 만나 ‘비참함의 전시’가 증폭되고 있다.

엄기호는 신작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우리 사회는 오로지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참의 전시를 통해서만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잊힌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말한다. 왼쪽 사진은 지난 4월16일 경기 안산시 정부합동분향소에서 열린 ‘4·16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 영결·추도식’에서 오열하는 유가족, 오른쪽은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촛불 추모제. 정지윤 기자·연합뉴스

엄기호는 신작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서 “우리 사회는 오로지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참의 전시를 통해서만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잊힌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말한다. 왼쪽 사진은 지난 4월16일 경기 안산시 정부합동분향소에서 열린 ‘4·16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 영결·추도식’에서 오열하는 유가족, 오른쪽은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촛불 추모제. 정지윤 기자·연합뉴스

노동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얻기는 갈수록 어렵고, 우정이나 사랑 등 친밀성은 고도로 상품화되었다. 이때 인터넷은 어떻게든 주목을 끌려는 새로운 형태의 ‘인정투쟁’의 무대가 된다.

다시 말해 저자가 “타인의 인격과 존엄을 파괴하고 그 비참을 전시하는 것을 통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관종’(지나친 관심을 원하는 ‘관심 종자’의 줄임말)들이 활개치게 된다. 관종이 대량으로 양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망신주기를 일삼는다. ‘신상털이’가 전형적인 수법인데, 대개 권력자나 명망가가 표적이 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관종들은 조금이라도 부도덕한 일이 벌어지면 총출동하여 그 대상을 발가벗기고 조리돌린다”고 말한다. 사건의 맥락이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팩트’라고 불리지만 실은 사건의 조각이나 단편들만이 초점이 된다.

신상털이는 “사람을 사냥해서 먹어치우는 디지털 시대의 카니발리즘, 인육 사냥”에 다름 아니다. 이름이나 얼굴, 사는 곳 등과 같은 개인정보와 함께 한 사람의 “사회적 생명인 자유와 인격 전체”가 말살되기 때문이다. 실제 중국에서는 신상털이를 ‘인육 사냥’이라고 부른다. 최근 여성들이 불법 촬영물에 의한 디지털 성폭력 이슈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이것이 재생될 때마다 자신의 정보, 곧 ‘육’이 발가벗겨지기 때문이다.

‘좋아요’ ‘베스트 댓글’ ‘실시간 검색어’ ‘추천 수’ 등과 같은 플랫폼의 장치들은 피해자들조차 관종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플랫폼 덕분에 고통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통로가 생겼지만, 대중의 한정된 관심을 차지하려면 다른 이들과 경쟁을 벌어야 한다. 누가 더 고통스러운지를 놓고 이른바 “고통의 올림픽”이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당사자들 스스로 피해자다움의 틀에 갇히고 만다. 사실 고통과 피해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피해자를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로 동일시하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고통 외에는 어떤 일상도, 말도 누릴 수 없다. 고 백남기 농민의 가족들이 피해자답지 않은 침착한 언어를 구사하고 식사를 하고 여행을 다녔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패륜아”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이 모든 상황을 저자는 “고통의 콜로세움”에 비유한다. 로마 시대처럼 노예 상인, 즉 관종들이 계속해서 사람들을 끌고 와 싸움을 시키고, 검투사들은 저마다 자신의 고통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관객들은 팝콘을 먹으며 이 모든 것을 구경한다. 콜로세움을 지배하는 정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혐오’다. 여기까지가 ‘고통의 사회학’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책은 또한 고통을 겪는 이들의 언어에 대한 담론 분석을 통해 고통을 이루는 여러 지층을 그려보인다. 재희 어머니를 비롯해 남편의 사업 실패와 불행한 결혼생활로 고통받는 선아, 아내와 사별한 뒤 사이비 종교에 빠져버린 전직 대학교수인 덕룡 아버지, 학생들의 무기력에 좌절하다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신자유주의’로 돌리게 된 교사 태석 등의 사례가 등장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고통을 한 방에 설명해주는 ‘주문’에 매달리면서 곁을 파국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실은 고통은 그 자체로 말할 수 없고, 그래서 근원적으로 외롭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다. 고통(苦痛)이 고통(孤痛)이 되는 것이다.

‘곁’은 학자이자 인권운동가, 또 현장 연구자인 저자가 오래도록 붙잡아온 화두이다. “고통을 겪는 이를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문제의식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고통의 당사자에게만 집중하다가 주위를 놓쳐버릴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가족들은 심한 우울감을 견뎌야 했고,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희생자를 수습했던 잠수사나 부검의들은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지금도 많은 활동가들이 가장 낮은 곳에서 노동자나 소수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저자는 “곁에 선 이가 ‘독박’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독박 육아, 독박 간병, 독박 업무… 뭐가 됐든 ‘독박’은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엄기호가 ‘곁’을 강조하는 것은 고통에 대한 연대가 ‘곁’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통은 동행을 모른다. 동행은 그 곁을 지키는 이의 곁에서 이뤄진다.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이에게 곁이 있을 때, 그 곁을 지키는 이는 이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관건은 고통의 곁, 그 곁에 곁을 구축하는 것이다.” 선문답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고통의 당사자들을 어떤 식으로든 지원하고 있는 가족이나 활동가들까지 사회적 지원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된다.

책을 받아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문 기사에서 가슴을 치는 말 한마디를 접했다. 지난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야근 작업 중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스물넷 하청노동자 김용균씨의 어머니는 최근 한 토론회에서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타들어가는 가슴을 열어서 얼마나 고통 속에 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다른 부모들은 나와 같은 일 정말 겪지 않길 바랍니다.” 절절한 고통을 호소하는 김용균씨 어머니의 곁에는 지금 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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