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의 보광사가 보리암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조선 현종 때인 1660년의 일이었다. 이유는 조선의 건국과 관련이 있다. 이성계는 조선을 창건하기 직전 보광사에 올라 백일 기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기도를 마치고 조선의 개국을 선포했다는 것은, 이미 역성 혁명이 성공했고 개국 준비의 마지막 단계로 ‘기도’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종은 보광사에 이성계의 기도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고 보광사를 왕실의 원당으로 삼은 뒤 보광사 이름도 ‘보리암’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보리암에 오르는 첫 번째 방법은 상주면에 있는 ‘금산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는 등산이다. 1코스를 선택하면 보리암까지 1시간 15분쯤 걸린다. 보리암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 방법을 선택하는 게 좋다. 하지만 경사가 심한 편이어서 등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겐 권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이다. 또 다른 방법이자 가장 흔한 접근법은 마을버스이다. 보리암 입구 주차장이자 셔틀버스가 운행하는 복곡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셔틀버스를 타거나, 여유가 있는 경우 금산 정상 부근, 보리암 초입 복곡 제2주차장까지 승용차로 오르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곳이 국립공원이라는 점, 정상 부근 주차장의 혼잡 등을 생각한다면 역시 복곡주차장에서 셔틀을 이용하는 게 무난하다. 간혹 주차장에서 걸어서 정상까지 오르는 여행자들도 만날 수 있다.
나는 오전 10시쯤 복곡주차장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이미 도로는 주차장에 들어가려는 대기 승용차로 가득, 결국 30분 정도를 기다린 끝에 겨우 주차할 수 있었다. 주차비는 소형차 기준 4000원이고 마을버스 요금은 왕복 2000원이다. 보리암이 있는 금산 일대는 국립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주차장과 매표소 곳곳에는 국립공원공단 직원들이 꽤 멋들어진 아웃도어 웨어를 입고 활동 중이었다. 10분쯤 달렸을까? 보리암 초입 주차장에서 내린 승객들은 다시 보리암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오솔길을 걸어 오늘의 목적지를 향했다. 차를 갖고 가고, 마을버스를 이용해 보리암까지 도달하는데 비수기 기준 7000원이 소요되는 셈이다(성수기 때는 8000원).
마침내 보리암에 도달했다. 보리암에서 남해를 내려다 보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도대체 이런 고산준령 바위산에 어쩌자고 절을 세웠단 말인가! 아무리 보아도 비현실적인 공간들, 단정한 가람들, 그리고 저 멀리 남해에 또박또박 서 있는 섬들과 웃는 입 모양의 남해상주해수욕장의 모습들에서 이미 마음의 위안은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물론 인파 역시 대단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떠드는 소란은 소란을 너머 아예 묵음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보리암은 깎아지르는 절벽 위에 있는 절 치고는 가람이 꽤 많은 편이다. 대웅전 격인 ‘보리암보광전’은 기록상 보리암 최초의 전각이지만 지금 보이는 건축물은 1968년에 중건하고 2000년에 중수한 것이다. 보광전에 모신 주불은 서천축 아유타국 허공주가 모시고 왔다고 전해지는 관세음보살(좌보처 남순동자, 우보처 해상용왕) 삼존상이다. 목조관음보살좌상불감은 2015년 1월15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575호로 지정되었다. 보광전 앞에는 설법당인 ‘예성당’이 있다. 사찰의 설법당에 가면 기둥에 써놓은 말씀, ‘주련’을 유심히 읽게 된다. 어느 사찰에 가도 주련의 내용은 선하고 심오하며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 무엇보다, 주련이 그 사찰의 개성을 나타내는 문장들이라 사찰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보리암 주련
사 바 극 락 자 재 유 沙婆極樂自在遊
사바와 극락 세계를 자유자재로 거니시며
재 시 법 시 무 외 시 財施法施無畏施
재물과 법을 가리지 않고 베푸시고
수 연 득 도 무 량 중 隨緣得度無量衆
한량없는 중생을 인연 닿는대로 구하시니
각 득 기 소 성 보 리 各得其所成菩提
바라는 바 깨달음을 모두 이루게 하시네
잠 시 첨 앙 제 번 뇌 暫時瞻仰除煩惱
잠시 동안 우러러 보는 것만으로 번뇌가 모두 없어지니
일 심 억 념 수 원 성 一心憶念隨願成
한 마음으로 생각하면 원하는 것을 이루리라
천 수 천 안 자 비 력 千手千眼慈悲力
천수천안의 자비하신 힘으로
무 차 평 등 함 해 탈 無差平等咸解脫
차별없이 평등으로 모두 해탈케 하시네
보리암전3층석탑은 가야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물길이 막혀 고난을 겪다 이 탑을 싣자 뱃길이 열려 무사히 돌아갔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원래 가야 본거지였던 현재 김해시 구지봉 호계사에 봉안되었던 것을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오래 전, 그 옛날옛적에,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보리암을 찾는 불자가 가장 많이 가는 곳은 해수관세음보살상이다. 보리암 불자가 기증해 헬리콥터로 운반해서 세워진 이 불상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한다.
보리암을 빠져 나와 금산 정상을 향해 걷는다. 정상까지는 200m. 정상 근처에는 부소암, 두모입구, 단군성전, 금산산장 등이 있다. 금산산장은 백만 불짜리 뷰를 지닌 국내 최고도 절벽 산장이다. 대체 누가, 언제, 이곳에 이런 유럽 성같은 산장을 만들었을까. 알아보니, 이곳은 원래 비구니 전용 암자였다고 한다. 수백 년 동안 도량으로 이용되어 오던 곳이 왜 개인에게 팔렸는지 그 연유는 아직은 모르겠으나, 어쨌든 일제시대 때 개인이 암자를 사 산장으로 영업을 시작한지도 100년이 되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산장이라 숙박은 물론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 얼마 전까지는 막걸리 등 술과 질펀한 안주도 팔았지만 금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산장 영업과 관련된 법률도 바뀌면서 이제 금산산장에서 술을 마실 수는 없다. 물론 흡연도 금지다.
산장 안방에는 할머니 두 분이 앉아 계신다. 두 분 모두 40년 넘게 산장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다. 높은 산, 맑은 물,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상주군과 바다의 섬들, 일 년 내내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 소리 영향일까? 내가 산장에 머문 30분 남짓 동안 두 사람의 노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늘 기분이 좋은 상태이신가 보다.
‘독일마을’은 관심과, 부담이 동시에 일어나는 마을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라 독일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니 관심이 가기도 하지만, 그곳이 오롯한 관광지만도 아닌,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사시는 동네라 시끄럽게 웃고 떠들기는 다소 미안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독일마을은 메인 스트리트 주변은 음식점 중심의 상업지역으로, 그 이외의 지역은 펜션을 겸한 거주지로 조성되어 있다. 독일마을은 독일식 가옥에 머물며 독일 문화를 접하고, 가까운 바다와 농촌 풍경을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여행지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독일마을은 1960년대 독일로 돈벌이 하러 떠났던 분들의 역이민, 재정착, 투자 등을 위해 남해군에서 조성한 마을이다. 그들이 어떻게 그 옛날 독일까지 가게 되었는지, 현지에서의 삶은 어땠는지 등은 독일마을 맨 꼭대기 광장 ‘도이쳐 플라츠’에 있는 ‘파독전시관’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독일마을 중심 도로변에는 많은 음식점들이 문을 열고 있는데, 점심 시간이라 그런지 집집마다 적지 않은 인파가 몰리고 있었다. 독일마을 오리지널 주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은 도이쳐 플라츠에 위치한다. 이름은 ‘도이쳐 임비스’. 임비스는 독일어로 ‘포장마차’를 뜻하는데, 이곳에서는 독일 정통 소시지와 맥주를 남해 특산물인 유자, 흑마늘, 멸치 등과 조합해서 판매하고 있다. 독일 가정, 주택, 정원을 체험하고 싶다면 독일마을에 문을 열고 있는 41곳의 펜션에서의 숙박을 권한다. 단, 독일마을 홈페이지에서 한 집 한 집 확인을 한 뒤 취향에 맞는 집을 선택하는 게 좋다.
[글 이영근(여행작가) 사진 이영근, 남해군청 웹사이트 발췌]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59호 (18.12.25)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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