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서쪽의 노팅 힐. 거리에는 색색의 파스텔 집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특별히 유명한 건축물이나 유적이 있어 유명한 거리도 있지만, 여기 노팅 힐은 그 거리 풍광의 아름다움만으로도 빛이 난다. 물론 영화 ‘노팅 힐’ 이후 이곳 역시 ‘영화 순례자들’의 발길에 끊이지 않는다. 영화 속 휴 그랜트가 운영하던 서점, 그가 살던 파란 대문 집 그리고 포트벨로 로드 마켓을 보기 위해 매주 금, 토요일이면 관광객이 넘쳐난다.
노팅 힐이란 이름의 유래에 정확한 팩트는 없다. ‘노트(Nott)’는 색슨족 ‘크노타 Cnotta’에서, ‘잉(Ing)’은 이곳을 찾은 이주민이 원주민 격인 색슨족에게 전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아무튼 이곳의 최초 지명은 ‘켄싱턴 파크’다.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인 포트벨로 마켓에는 유독 중고 상점, 꽃과 야채, 과일 가게, 옷 가게, 골동품점, 액세서리나 그림 등을 파는 수많은 가게가 몰려 있다. 사실 노팅 힐에서 역사적 사건 등을 찾기는 쉽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에서 일어난 몇 건의 인종 폭동 중에서도 ‘테디 보이스’가 일으킨 ‘노팅 힐 인종 폭동’으로 거리는 상처를 많이 입었다. 그 치유를 위해 만들어진 노팅 힐 카니발이 이제는 세계 사람을 모으는 축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노팅 힐은 평범하다.
사랑에는 우연이 꼭 따라온다
노팅 힐, 이혼남 윌리엄은 이곳에서 조그마한 여행 전문 서점 ‘트래블러 북숍’을 운영하며 서점에서 가까운 집에서 살고 있다. 윌리엄은 무엇이 되겠다는 꿈도, 포부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 친구들과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다. 젊은 시절 이 동네 최고 미남이던 잘 생긴 외모 역시 이제는 시들어 ‘아저씨 필’이 완연하다. 윌리엄과 같은 집에 사는 친구 스파이크(리스 이반스)는 조금 괴상한 녀석이다. 집에서는 거의 팬티 차림이고 헤어스타일이나 하는 짓도 ‘친구니까’ 이해해 줄 정도다.
따분하리만치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윌리엄. 이때 누군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선다. 선글라스를 쓴 아름다운 여인. 윌리엄은 그녀를 금방 알아본다.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할리우드 여배우 안나 스콧이다. 안나는 영화 시사회 때문에 런던에 왔다가 잠시 짬을 내 노팅 힐 거리를 산책하다 서점에 들어온 것. 윌리엄은 안나를 보고 어쩔 줄 모른다. 잠시 후 안나는 책을 고른 후 서점을 나간다. 윌리엄은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오렌지 주스를 사가지고 온다. 골목을 도는 순간, 윌리엄은 누군가와 부딪치며 그만 오렌지 주스를 쏟고 만다. 아뿔싸! 안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윌리엄은 안나에게 “우리 집이 여기서 가까워요. 집에 가서 옷을 좀 갈아입어요”라고 제안한다. 안나는 윌리엄의 집으로 간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안나. 윌리엄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안나는 윌리엄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돌아간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호감을 느꼈다. 윌리엄에게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안나와 만남, 게다가 그녀가 내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더구나 가벼운 키스까지 해 주다니. 윌리엄의 오늘은 짜릿했다.
그날 이후, 윌리엄의 정신은 온통 안나에게 가 있었다. 집에 와서는 스파이크에게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가 없는지 묻는 것이 일이 되었다. 스파이크는 “응. 전화 왔어. 애나라는 어떤 미국 여자애”가 “전화해”달랬다고 전한다. 안나가 애나라는 가명으로 묵고 있는 피카딜리에 있는 최고급 리츠 호텔로 윌리엄을 초청한 것. 윌리엄은 기쁜 마음으로 안나에게 간다. 마침 안나는 기자와 인터뷰 중이었다. 윌리엄은 얼떨결에 옆 탁자에 놓인 잡지 『말과 사냥개』의 기자 행세를 하며 인터뷰에 참여한다. 윌리엄은 천연덕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한다. 윌리엄의 이런 모습에 호감을 느낀 안나. 그녀는 “내 동생 허니의 생일 파티에 초대하고 싶다”는 윌리엄의 제안을 승낙한다.
기자의 눈을 피해 허니의 생일 파티에 온 안나. 윌리엄의 친구들과 허니는 처음에 안나를 윌리엄의 새 여자 친구로 생각했다가 이내 안나 스콧임을 알아보고 함성을 지르고 환영한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안나. 안나는 윌리엄과 친구들의 우정 그리고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식탁에는 디저트로 나온 브라우니 한 개가 남아 있다. 그때 누군가 “우리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이것을 먹기로 하자”고 제안한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최대한 슬프게 토로한다. 윌리엄의 친구가 윌리엄을 설명한다. “이혼했지, 지금은 애인도 없지, 외모도 이제는 삭았다”고 하자 윌리엄은 “이제 브라우니는 내 것이지?”라고 묻는다. 그때 안나가 “나도 이야기를 할 수 있지요?”라며 게임에 참여한다.
안나는 말한다. “난 19살부터 다이어트를 했어요. 거의 10년은 굶주리고 살았죠. 애인도 있었지만 매번 헤어졌고 심지어는 맞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언론은 마치 ‘잔치’처럼 내 기사를 썼죠. 그리고 이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두 번이나 수술을 했어요. 이제 내 미모도 사라지면 사람들은 다 나를 잊겠지요.”
갑자기 숙연해진다. 그때 누군가 “에이, 거짓말, 믿을 수 없어”라며 웃자 모두 웃는다. 물론 안나도 크게 웃는다. 이 날을 계기로 안나와 윌리엄은 더욱 가까워진다. 식당, 극장도 다니며 두 사람은 비밀 데이트를 즐긴다. 안나는 윌리엄을 자신의 호텔로 데려간다. 그러나 문을 열자 뜻밖에도 그녀의 남자 친구가 미국에서 와 기다리고 있다. 당황하는 안나. 윌리엄은 안나가 미안해할까 봐 “룸서비스입니다. 뭐 시킬 일 있습니까?”라며 상황을 넘긴다. 그렇게 윌리엄과 안나는 헤어졌다.
“안나, 당신의 몸을 보다니, 너무 비현실적인 것 같아요.”
“영국 사람들은 이미 다 봤어요.”
“그건, 유감이에요.”
“그런데 남자들은 왜 여자의 나신, 특히 가슴을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이 세상 여자들은 다 있는데.”
“글쎄요. 생각이 안 나요. 다시 한 번 보고요.”
“리타 헤이워드가 말했어요. ‘남자들은 길다와 잠자리에 들어 아침이면 나와 함께 있다’고. 남자들은 꿈을 갖고 여자와 잠자리에 들죠. 그리고 아침이면 실망하고.”
“그렇지 않아요. 지금 당신은 너무나 사랑스러워요.”
안나와 윌리엄은 긴 키스를 나눈다. 너무나 행복한 두 사람이다. 그러나 이 행복은, 이 행운은 그리 길지 않았다. 윌리엄의 친구 스파이크가 술에 취해 “내 집에 안나 스콧이 있다고. 정말이야. 내 친구 윌리엄과 함께”라며 떠든 것이다.
아침, 윌리엄은 속옷 차림으로 문을 열다 깜짝 놀란다. 대문 밖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안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당황한 윌리엄.
“안나, 나도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나는 알아요. 털북숭이 당신 친구가 돈 몇 푼 벌려고 내가 여기 있다고 날 판 거죠.”
“아니에요 안나. 그렇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영국의 모든 기자들이 안나 스콧이 노팅 힐의 파란 대문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왜 속옷 차림으로 밖에 나갔나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난 망했어요. 그리고 아직까지 난 대외적으로 애인도 있다고요. 내일이면 속옷 차림의 당신 사진이 신문 전체에 실릴 테니….”
“안나, 일단 진정하고….”
“당신은 신바람이 나겠지요. 어딜 가도 ‘그 여배우랑 잤지요?’, ‘사진 봤어요’라는 말을 듣겠죠.”
“말이 심하네요. 안나.”
“그리고 서점도 잘 될 거예요. ‘안나 스콧과 그 짓 한 남자가 추천하는 이집트 여행 책’. 그리고 당신 친구 스파이크한테 한턱 내라고 해요. 아마도 한몫 단단히 챙겼을 테니까.”
“안나, 그건 사실이 아녜요. 정말 말이 안 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이 세상에는 더 심각한 일들도 많아요.”
“아, 네, 그래요. 이만 갈 게요. 반가웠어요.”
안나는 윌리엄이 유명해지고 싶어서 친구와 짜고 자신을 이용했다고 오해한다. 그녀는 윌리엄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그렇게 안나는 또 떠났다.
“안나, 저기 기다리고 있는 친구는 누구야?”
“아, 별 사이 아녜요. 그저 예전에 알던 친구예요.”
조용히 헤드폰을 벗는 윌리엄. 그리고 이내 촬영장을 벗어난다. 윌리엄은 안나를 잊기로 결심한다. 며칠 후 윌리엄의 서점으로 안나가 찾아온다. 환하면서도 어색한 미소를 짓는 안나.
“윌리엄. 나는 오늘 떠나요. 하지만 당신이 날 다시 받아주고 좋아해 준다면, 떠나지 않겠어요.”
“안나, 촬영장에서 그 배우에게 나랑 끝났다고 말했잖아요. 들었어요. 헤드폰을 꼈거든요.”
“내가 왜 그 속물에게 내 속마음을 밝히겠어요.”
“나는 평범해요. 사랑도 많이 못 해 봤어요. 당신의 제의는 고맙지만, 안 되겠어요.”
“그래요, 이해해요.”
“안나, 당신은 내겐 벅찬 사람이에요. 당신의 그 급한 성격은 그렇다 쳐도, 나처럼 사랑에 미숙한 놈이 또 상처를 받으면 그땐 회복이 불가능해요. 당신은 일도 많고 바쁘고, 난 분명히 상처받을 거예요.”
“그래요. 확실한 거절이군요.”
“우린 세계가 달라요. 당신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나는 아무도 모르죠.”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이해해요. 하지만 인기는 뜬구름 같아요. 나도 그저 여자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요. 남자 앞에 서서 사랑을 바라는… 잘 있어요.”
안나의 고백을 거절한 윌리엄은 고민한다. 그리고 윌리엄은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이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고 깨닫는다. 안나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안나가 영국에서 마지막 기자 회견을 하는 호텔로 향한다. 겨우 기자 회견장에 도착한 윌리엄. 그는 기자들 틈에서 안나를 바라본다.
“안나, 영국에는 언제까지 머무나요?”
“곧 떠날 것입니다.”
“안나, 그때 그 영국 남자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그와는 친구입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받겠어요. 음, 저기 분홍 셔츠?” 윌리엄이다.
“스콧 양, 혹시 이런 상황이 될 수 있을까요? 그 영국 친구와 연인이 될 수도 있습니까?” 잠시 윌리엄을 바라보는 안나.
“그러길 바랬지만 안 됐네요. 불가능할 것 같아요.”
“하지만, 만일, 그냥 알고 싶어서요. 그 영국 남자가, 그래요. 태커! 태커 씨가 자기 실수를 깨닫고 싹싹 빌면서 무릎 꿇고 생각을 돌려 달라고 애원하면 받아 줄 건가요?” 모든 시선이 안나에게 쏠린다. 잠시 생각하던 안나. 환한 미소 를 지으며 대답한다.
“네, 그럼요.”
“정말 기쁩니다. 『말과 사냥개』 독자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안나는 매니저에게 아까의 질문을 다시 물어 달라고 부탁한다.
“도미닉, 아까 그 질문을 다시 해 주시겠어요?”
“안나, 영국에는 언제까지 머물 예정이지요?”
“영원히요.”
그 순간, 기자 회견장은 웅성거리고 기자들의 시선이 안나와 윌리엄에게 쏠린다. 윌리엄이 ‘바로 그 영국 남자’임을 알아본 것이다. 안나와 윌리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본다. 결혼식을 올리고 극장 시사회에 참석하는 두 사람. 그리고 공원 벤치, 임신한 안나가 윌리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 책을 읽는 윌리엄. 엘비스 코스텔로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She’가 흐른다.
‘그녀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일 거예요. 기쁨과 회한이 묻어 있는 그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일 수도 있죠. 그녀는 여름이 부르는 노래일 거예요. 가을이 선사하는 아이들일지 모르고요. 하루에도 수없이 다르게 변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그녀는 미녀나 야수일 거예요. 굶주림과 향연일지 모르고요. 매일을 지옥과 천국으로 바꿔 놓을 수도 있겠죠. 그녀는 나의 꿈을 비추는 거울일 거예요. 냇물에 비친 미소일지 모르고요.
항상 행복해 보이는 그녀. 그녀의 두 눈에는 당당함이 서려 있어요. 두 눈에 눈물이 고이면 어느 누구도 쳐다볼 수 없지요. 그녀는 영원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랑일 거예요.
그녀는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일 거예요. 앞으로의 험난한 세월을 통해 스스로 보살펴야 할 그런 나의 삶에 대한 이유. 웃음과 눈물 그 모두를 받아들이겠어요. 그리고 추억으로 간직하겠어요. 그녀가 떠나면 나는 홀로 살아가야 해요. 내 인생의 의미는… 그녀. 그녀(She).’
이 아름다운 로맨틱 코미디는 2009년 작품이다. 각본은 리처드 커티스. 그는 ‘노팅 힐’을 비롯해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러브 액추얼리’,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등을 쓴 ‘영국산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다. 영화는 물론 ’판타지‘다. 당대 최고 여배우와 평범한 남성의 사랑, 현실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꿈 같은 이야기’이기에 더 사랑받았을 것이다. 로코에 최적인 휴 그랜트와 할리우드에서 가장 미소가 아름다운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의 케미가 돋보였다. 줄리아 로버츠는 로맨틱 코미디, 멜로, 법정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 주는 배우.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수상과 여배우 중에서 최초로 출연료 2000만 달러를 돌파한 이유를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증명했다.
노팅 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 영화와 함께 세계 10대 카니발 중 하나인 ‘노팅 힐 카니발’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노팅 힐 카니발보다 에든버러 축제가 더 익숙하지만 두 축제는 성격이 다르다. 에든버러는 연극, 미술, 공연 등이 한데 모이는 ‘문화와 예술의 축제’다. 그에 비해 노팅 힐 카니발은 일종의 거리 축제로 브라질의 리오 축제와 그 모습이 닮았다. 거리에서 온갖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음악과 춤 등을 선보인다.
노팅 힐 카니발의 시작은 1950년대로, 오늘날과 같은 형태와 규모가 된 것은 1964년이다. 매년 8월 마지막 주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간 열리는 이 축제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 축제의 탄생 배경에는 인종 차별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노예 제도가 사라진 것은 1833년이다. 그 후 런던에는 다양한 식민지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특히 런던 노팅 힐에는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출신들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했다. 그들은 1950대부터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전통 음악과 춤을 즐기는 ‘작은 축제’를 벌여 왔다. 이 축제는 이민자들이 영국에서 겪는 인종과 신분, 계급 차별로 인한 울분과 스트레스를 푸는 그들만의 한바탕 한풀이였다.
초기에는 축제의 가장 큰 볼거리인 퍼레이드는 과거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주인’이던 백인을 풍자하는 것이 주류였다. 과도한 분장과 의상, 몸짓 등을 연출했지만 지금은 카리브해 출신뿐 아니라 다른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도 참여하는 ‘모두의 축제’가 되었다. 특히 이 카니발에서 주목할 것은 ‘칼립소(Calypso)’로 대표되는 음악이다. 칼립소는 카리브해 사탕수수 농장 노예들이 노래의 형식을 빌어 자신들만의 의사 전달 도구로 시작한 음악. 또한 중남미 특유의 밝고 경쾌한 음악은 물론이고 강렬한 타악기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스틸 밴드’ 등도 노팅 힐 카니발에서 들을 수 있다.
또 하나 노팅 힐 인종 폭동과 관련 있는 키워드는 ‘테디 보이스 Teddy Boys’다. ‘테디’는 1950년대 영국의 하류층 청년, 주로 노동자 2세를 지칭한다. 전후 일부 부유층 젊은이들은 과거 에드워드 7세 시기의 의상을 모방하고 다녔다. 이들은 에드워드 7세의 애칭인 ‘테디’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따왔다. 이때만 해도 일부의 유행처럼 보였지만 진짜 테디들이 이들을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테디 보이스’라는 그룹이 생긴 것이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민자의 거리 노팅 힐. 이곳에서 벌어진 톱스타와 평범한 남성의 사랑 이야기는 어쩌면 이질적인 객체의 화합 같은 것은 아닐까. 그것을 우리들은 판타지라고 부른다. 즉 현실에서는 생길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노팅 힐의 역사가 품고 있는 인종 차별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 세계적인 축제를 만들어 냈듯, 노팅 힐에서는 ‘사랑의 판타지’도 가능하다는 것을 작가 리처드 커티스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윌리엄은 안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베벌리힐스에 살고, 나는 여기에 살고. 또 당신은 누구나 그 이름을 알지만, 난 내 어머니도 가끔은 이름을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지요. 그래서 당신의 사랑은 고맙지만, 나는 이제 사랑에 상처받으면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의 사랑을 받기 어려워요.”
만약 현실이라면 윌리엄의 이 말이 톱스타의 사랑 고백을 받는 이의 ‘모범 답안’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윌리엄은 안나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무릎 꿇고 실수를 싹싹 빈다면 다시 받아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사랑은 그냥 굴러들어 오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 가슴 아프고, 또 적당한 갈등과 위기라는 효소로 발효되어야만 하는 것이 사랑의 결실이다. 그 사랑의 발효가 가장 적당했던 곳이 아마도 리처드 커티스의 눈에는 노팅 힐이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노팅 힐을 사랑하고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비록 반세기 전 인종 차별이 극에 달했고 아직도 런던 곳곳에서 인종 차별의 상처가 계속되지만, 적어도 노팅 힐에서만큼은 판타지가 가능하다. 사랑, 화합, 소통 그리고 우리가 되는.
[글 정유진(프리랜서) 사진 픽사베이, 위키피디아, 포토파크, Daum영화, Naver영화]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58호 (18.12.1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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