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신청 서비스 안내

‘슈퍼 사이클’ 한풀 꺾인 반도체-일시적 조정과 구조적 위기 갈림길 낙관론 솔솔…‘上低下高’ 예측 우세

  • 강승태 기자
  • 입력 : 2018.12.07 09:22:19
  • 최종수정 : 2018.12.07 10:25:59
“한국 경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 실적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반도체 시장이 악화되면 큰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블룸버그통신)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지난해 61.5%, 올해 33.2% 매출이 증가했지만 내년에는 0.3%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

“반도체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면서 반도체 수출 증가율은 올해 30%대에서 내년 5%까지 내려앉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무역협회)

-1.7%.

반도체를 제외한 올해 9월까지 수출 증가율이다. 반도체를 포함하면 이 수치는 4.7%로 바뀐다. 반도체가 국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다는 점을 암시하는 숫자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마지막 등불이다. 증권사 한 애널리스트는 “한국 메모리는 마치 ‘산유국의’ 석유처럼 독점적 지위를 갖는다”고 표현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하지만 최근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꼭짓점을 찍고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된다. 외국계 증권사를 시작으로 국내 주요 연구원에서도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와 내년의 반도체 산업 분위기가 다를 것”이라며 “세계 경제 위축과 차이나 리스크로 인한 반도체 수요 둔화로 인해 성장세는 정체될 전망”이라고 전했다.

한국 반도체 위기설은 SK그룹이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했던 2011년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됐던 이슈다. 하지만 최근 거론되는 위기설은 한국 경제 상황과 맞물려 일파만파 확대 해석되고 있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반도체 위기설,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D램 가격 하락과 IT 수요 부진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D램 가격 하락과 IT 수요 부진으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반도체 위기론 근거는

▷가격 하락에 IT 수요 감소

반도체 위기론의 첫 번째 근거는 현물 가격 하락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 주력 상품인 D램은 올해 지나칠 만큼 많이 올랐다. D램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른 이유는 단순하다. 공급량 대비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뿐 아니라 서버, 그래픽 등 수요가 다양해지면서 D램 가격은 상승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9월 정점을 찍은 후 D램 현물 가격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D램(PC용 제품·DDR4 8Gb 1Gx8 2133㎒) 평균 거래 가격(ASP)은 7.31달러를 기록했다. 9월 대비 약 10.7% 낮아졌다. 이 제품 가격은 8월 말 한때 8달러를 넘어섰지만 11월 들어서도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내년이다. D램익스체인지는 “올해 4분기에 이어 내년 D램 가격이 올해보다 15~20% 떨어질 수 있다”며 “앞으로 가격 하락세는 지금보다 더 가파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시장이 공급과잉에 접어들었고 수요 업체 재고량도 많다는 것이 D램익스체인지 측 주장이다.

현물 가격은 향후 반도체 시장 상황을 알려주는 선행지표다. 다만 현물 가격은 대부분 중저가 반도체나 규모가 작은 거래에만 주로 활용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처럼 생산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현물 거래 비중은 높지 않다. 이때 적용되는 가격은 현물 가격이 아닌 고정 거래 가격이다. 글로벌 IT 업체는 국내 반도체 업체와 미리 물량을 계약하고 자사 제품에 맞는 제품을 확보한다. 1년 이상 장기적으로 계약하기 때문에 매일 바뀌는 현물 가격이 실적에 아주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당장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현물 가격 하락에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낮다.

어쩌면 현물 가격 하락보다 더 큰 뉴스가 있다. 바로 미국 주요 IT 기업의 가격 인하 요구 소식이다. 클라우드에 사용되는 서버 원가에서 D램 비중은 점점 커져 최근 30%를 넘어섰다. 이 때문에 FAANG(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으로 대변되는 미국 주요 IT 기업은 한국 업체에 반도체 가격 인하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몇 년간 메모리 반도체 수요 증가는 B2B 기업이 이끌었다. 아마존을 필두로 구글, 페이스북 등 거대 IT 기업은 경쟁적으로 데이터센터 규모를 키웠다. 이 과정에서 서버용 D램 공급 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한쪽에서는 암호화폐 열풍으로 그래픽 D램 수요 또한 폭증했다. 하지만 올해 4분기부터 수요가 대폭 줄었다. 암호화폐 시장이 식으면서 그래픽 D램 수요는 급격히 줄었다.

서버나 그래픽뿐 아니다. 스마트폰 시장이 침체를 겪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최근 애플은 아이폰 신제품 생산량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모바일 시장은 D램 수요의 한 축을 맡아왔다. 스마트폰과 같은 완제품 수요 감소는 국내 반도체 업계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약 1년 이상 지속적으로 진행돼온 메모리 시장 호황은 미래 수요를 미리 확보하려는 IT 기업의 ‘재고 비축 기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며 “재고 비축이 끝난 올해 하반기부터 글로벌 IT 기업과 한국 기업 간 가격 협상을 위한 ‘줄다리기’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거센 압박

▷반도체 굴기보다 무서운 반독점법

지난 몇 년간 반도체 위기설이 제기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있다. ‘중국 반도체 굴기’다.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전략적으로 투자하고 있음을 일컫는 용어다.

D램 분야에서는 푸젠진화반도체(JHICC)가 공장을 짓고 있다. 낸드플래시는 칭화유니그룹이 소유한 YMTC 등이 개발에 앞장선다. 중국에서 짓는 반도체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면 세계 물량의 30% 이상을 소화할 수 있다. 시장 진입에 성공한다면 중국 업체의 ‘물량 공세’는 분명 위협이 될 터다.

하지만 상당수 반도체 전문가들은 중국의 메모리 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불과 4~5년 전만 해도 “2018년부터 중국이 본격적으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할 것”이란 얘기가 나왔다. 이미 2018년이 끝나가고 있지만 중국이 D램은 물론 낸드플래시 양산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중국 반도체에 대한 우려가 과도하다는 의견도 적잖다. 업계 한 전문가는 “중국 D램 경쟁력은 삼성전자와 비교해 최소 6~7년, SK하이닉스 대비 4~5년 뒤져 있다”며 “기술 격차가 5년 이상 난다는 얘기는 차라리 생산하지 않는 것이 나을 정도로 기술력이 뒤처져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2~3년 전과 비교해도 한중 메모리 기술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국이 전략적으로 앞세우는 낸드플래시도 비슷하다. 최소 5년은 지나야 의미 있는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경제의 반도체 의존도가 높다 보니 중국 반도체 굴기 위협이 과대 포장된 측면도 없지 않다는 분석이다. 미리 대비해 나쁠 것은 없지만 지나친 걱정도 좋지만은 않다. 또 다른 한 전문가는 “중국 메모리 반도체 공장은 조 단위 투자 규모에 비해 이뤄놓은 것은 거의 없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하려면 대규모 M&A가 선행돼야 한다”며 “미국 마이크론과 같은 큰 기업을 인수하지 않으면 대규모 양산 시스템을 갖추는 데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중국 반도체 굴기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바로 반독점 조사다. 중국 정부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담합으로 가격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며 조사를 진행 중이다. 중국 반독점 당국은 “반도체 3개 업체(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에 대한 반독점 조사를 통해 다량의 증거를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 5월 3사 중국법인을 수색하고 약 6개월간 조사를 펼쳤다. 이번 발표는 6개월간 조사 끝에 가격 담합 혐의에 대한 의미 있는 증거를 확보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국 언론은 독점 행위가 인정되면 세 기업 과징금이 최대 80억달러(약 9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반독점 행위가 인정되면 단순히 벌금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반도체 수출액의 절반 이상은 중국으로 향한다. 지난 10월 기준 반도체 수출액 가운데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64%에 이른다. 중국 정부가 한국 반도체 기업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면 국내 반도체 산업뿐 아니라 IT 산업 전체가 휘청거릴 수 있다. 국내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 간 기술력 차이가 있는데 가격 담합 이유가 없다”고 말했지만 중국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메모리 3사를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IT 수요 부진에 대비해 설비투자를 줄이기 시작했다. 사진은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SK하이닉스 M14 공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IT 수요 부진에 대비해 설비투자를 줄이기 시작했다. 사진은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SK하이닉스 M14 공장.

▶투자속도 조절 나선 한국 기업

▷‘슈퍼 호황’ 아니지만 여전히 ‘호황’

중국 반독점 당국의 조사나 미중 무역분쟁 등은 대외적인 변수다. 한국 기업으로서는 손쓰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불가항력적인 변수를 제외하면 반도체 위기설의 핵심은 바로 ‘공급과잉’이다.

최근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의미 있는 통계를 발표했다. 지난 10월 북미 반도체 장비업체 매출액 증가율이 지난해와 비교해 2% 증가하는 데 그쳤다고 밝혔다. 지난 5월(19%)이나 6월(8%)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하락한 수치다.

투자 축소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주요 업체가 향후 반도체 시장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장비업체 매출은 반도체 시장에서 선행지표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독보적 1위를 달리고 있지만 반도체 장비 시장은 미국이 압도적이다. 즉, 북미 반도체 장비업체 매출 흐름을 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기업의 투자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기업이 반도체 경기 하락을 우려해 장비 구입을 줄였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투자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삼성전자 지난해 반도체 투자 규모는 27조3000억원에서 올해 24조9000억원으로 약 9% 감소했다. SK하이닉스 또한 내년 투자 지출 규모를 올해 대비 줄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지트 마노자 SEMI CEO는 “북미 반도체 장비업체 매출 증가율이 감소한 것은 PC·휴대전화·서버 등 세트 업체의 반도체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라며 “반도체 업체가 가격 하락에 따라 투자 계획을 철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해석은 보다 입체적이다. 반도체 업체가 스스로 생산량과 투자를 조절함으로써 가격 방어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반도체 시장은 주기적으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됐다. 요즘은 다르다. 불황의 주기는 짧아졌으며 패턴도 보다 불규칙적이다. 이유가 있다. D램 기업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사로 줄어들면서 향후 생산량 예측이 가능해졌다. 3사의 D램 시장점유율은 95%에 이른다. 업체 숫자가 줄면서 시장을 바꿀 수 있는 변수가 많이 줄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호황기에도 장비 구입을 줄이는 등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반도체 시장에 위기가 와도 이미 국내 업체는 손쓸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경쟁사 눈치를 살피지 않고 필요에 따라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며 “영업이익률을 50% 가까이 유지할 수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반도체 시장에 지나친 위기감이 조성됐다”며 낙관론도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폭발적인 상승 추세는 꺾였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위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이다. ‘슈퍼 호황’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호황’인 상황을 위기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분석이다. 대부분 전문가가 내년 반도체 시장을 ‘상저하고’로 예상하는 것도 조금씩 긍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도연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투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내년 설비투자를 줄이고 있다”며 “내년 D램 업체의 생산량 증가도 예상보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큰 폭의 가격 하락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부터 주요 D램 공급사의 시설투자가 둔화되면 당장 내년 3분기부터 공급 부족이 재현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양산이 늦어지고 있다는 점도 한국 업체에는 희소식이다. 중국 업체는 당초 내년부터 메모리 반도체를 양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 상무부가 미국 반도체 장비업체에 중국 수출금지 명령을 내리면서 양산 지연이 불가피해졌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중국 회사들은 라인 건설을 완료하고 양산을 앞두고 있었으나 미국 정부의 제재로 설비투자(CAPEX)는 올해와 유사한 수준에 그칠 것”이라며 “중국 업체의 시장 진입이 어려워질 경우 D램 공급과잉은 하반기부터 완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앞으로 예측 가능한 여러 호재도 무시할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메모리 반도체는 필수재가 됐다. 내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을 중심으로 5G 통신 시대가 열린다. 게임이나 동영상 최적화를 위해서는 많은 용량의 D램이 필요하다.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IoT(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면 메모리 수요가 큰 폭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위기론을 다소 과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처럼 국내 반도체 기업 영업이익률이 50%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20~30% 영업이익률 유지는 가능하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증산하지 않고 시장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접근한다. 기술장벽도 높아졌다. 10년 전처럼 단기간에 공급량이 늘어나면서 가격이 확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고위 관계자의 판단이다.

[강승태 기자 kangst@mk.co.kr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86호 (2018.12.05~12.11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