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26사건 합수본부는 ‘전두환의 권력찬탈 작전본부’였다

강원택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합동수사본부의 정체

1979년 10월28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10·26 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처음 주목을 받은 시점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진 크게보기

1979년 10월28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10·26 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처음 주목을 받은 시점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두환이 일반 대중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9년 10월28일 합동수사본부(합수본부)장으로서 10·26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이다. TV 속의 그의 모습은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눈매와 표정이 날카롭고 사나워 보였다. 전두환 자신도 그런 대중의 반응에 대해 알고 있었다. “발표문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쳐다보는 내 눈이 붉게 충혈이 되어 몹시 무서운 모습으로 비쳤다는 것이다. … 그날의 그 사납고 날카로워 보이던 내 모습이 나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남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전두환 회고록 1>, 76쪽)

권력장악 전초기지 합수본부
중앙정보부장 겸직하면서도
본부장 자리 거머쥔 전두환
검·경·중정까지 직접 관여

전두환은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0·26 이후 합수본부장이 되었다. 그런데 합수본부에 대해서는 그동안 일반인들에게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합수본부가 10·26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임시 기구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합수본부는 1979년 10월26일에 구성돼 전두환의 권력 장악이 마무리되면서 계엄령을 해제한 1981년 1월24일까지 존속했다.

<제5공화국 전사(前史)>(5공 전사)는 합수본부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싣고 있다. <5공 전사>는 “계엄하에서 수사 관할이 다른 모든 정보 수사기관(보안·헌병·검찰·경찰·중앙정보부)의 업무를 조정 감독하고 주요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수본부의 설치 이유를 들었다. 애당초 합수본부가 만들어진 것은 대통령 시해사건 조사라는 명분 때문이었지만, 전두환은 계엄 상황을 핑계로 이를 상설기관으로 만들었다. 사실 ‘합동’수사본부라고 하지만 경찰 출신 3명이 수사단 일부를 맡은 것을 제외하면 다른 중요 부서들은 모두 군 고위 장교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사실상 보안사 중심의 기구라고 볼 수 있다. 즉, 전두환은 보안사를 중심으로 검찰·경찰·중앙정보부(중정) 등 다른 공안기관까지 모두 지휘하고자 했던 것이다.

전두환이 합수본부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그가 5·17 전국 계엄 확대 이후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도 합수본부장직을 겸임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전두환이 그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1980년 8월16일 최규하가 대통령직 사퇴를 발표하고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거가 예정됐던 8월21일이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고 난 후에야 합수본부장직에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고 난 이후에는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노태우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처럼 합수본부는 전두환의 권력 장악의 매우 중요한 기반이었다.

합수본부는 본부장 아래 참모장과 비서실장을 두었고, 안전처·정보처·수사단 등 방대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예하 합동수사단도 두었는데 도 단위에 10개, 군 사령부 급에 3개, 군단 급에 5개의 조직을 갖췄다. 이 중 정보처는 사회 동향을 사찰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보처의 역할은 합수본부장이 사회 일반정세를 정확하게 알고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 건의할 수 있도록 민심 동향, 오열분자 준동 상태, 학원가 동향 그리고 계엄 업무에 대한 여론 및 기타 정보를 모집하는 것이었다.”(<5공 전사>, 1755쪽) 당시 학원과 정치권 사찰, 각종 정치공작을 정보처가 담당한 것이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안전처의 역할이다. “안전국(안전처의 오기인 듯)은 합수본부장이 군부 문제에 관한 한 심려치 않고 오직 난국 타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불순 정치세력의 군부 침투봉쇄를 비롯한 저해요소 척결에 주력했다. 또 10·26, 12·12 이후 군 지휘관들의 정세에 관한 궁금증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소신 있는 부대 지휘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로 매일 매일의 국내외 정세와 계엄 진행사항을 일일첩보로 만들어 군 지휘관들에게 배포해 군의 절대안정과 대동단결에 힘썼다.”(1755쪽) 즉 안전처는 군부 내의 전두환 반대 세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12·12 군부 반란 이후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자신들에 대한 군부 내의 반발과 저항을 사전에 막고자 한 것이다.

전두환은 합수본부 내 ‘실무대책협의회’라는 것을 만들어 공안기관을 넘어 다른 행정기관에까지 간여하는 월권을 행하기 시작했다.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관계기관의 실무자들을 초치하여 정보, 수사 실무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이 대책협의회의 실무 구성 요원들은 합수의 정보국장, 중정 기획국장, 치안본부 3부장, 검찰국장,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문공부 공보국장, 문교부 학술진흥국장 등이었다. 합수본부장을 보좌하여 이 대책협의회가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점들을 분석, 대책을 수립하여 정책에 반영된 내용들로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와 구속자 석방, 정치인·문제 교수·학생들에 대한 복권조치, 새로운 학원소요 진압대책 강구, 경기회복 대책 등 제5공화국 출범의 밑거름이 되는 것들이었다.”(1755~1756쪽) <5공 전사> 편찬자들이 ‘5공 출범의 밑거름이 되는 것’으로 예시한 것들은 모두 합수본부장 정도의 직책으로는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사안에 대해 전두환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2월8일 해제되었다. <5공 전사> 저자들의 기록이 옳다면, 전두환은 12·12 이전부터 당시 정국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합수본부 무슨 일 했나
정보처, 사회 동향 사찰 역할
안전처, 군 내 반대 세력 감시
삼청교육대·김대중 체포에
5·17 쿠데타까지 계획·실행

합수본부는 전두환의 권력 장악을 위한 전초 기지라는 점에서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5·17 쿠데타를 모의한 곳 역시 합수본부였다. “합동수사본부는 (…) 사태가 점점 더 악화되어 가자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동시에 정국 혼미의 핵심 인물인 김대중과 그 추종세력의 검거를 건의, 그들의 내란음모 사건 전모를 밝힘으로써 위기일로를 치닫고 있는 정국에 일단 제동을 가하였다.”(1778쪽)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 조계종에 대한 ‘10·27 법난’ 역시 합수본부의 아이디어였다. “뿌리 깊은 사회악을 일소하여 건전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삼청계획’의 일환으로 사회의 암적 요소였던 불량배나 깡패 등에 대한 일제 검거와 이들에 대한 순화교육의 실시를 건의하여 시행토록 함으로써 국민 생활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합수본부는 그동안 종파 싸움 등으로 국민의 지탄이 되어 왔던 불교계의 정화를 위하여 대대적으로 승려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건전한 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1760~1762쪽)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드는 것은 실질적으로 모든 공안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전두환이 왜 중앙정보부장 자리까지 차지하려고 했을까 하는 점이다. 김재규가 체포된 이후 중정 부장은 이희성이 맡고 있다가 12·12 사태 직후 육군참모총장으로 자리를 옮겨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합수본부가 사실상 공안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주위의 비판을 무릅쓰고 굳이 중정부장까지 차지할 필요가 있었을까? 전두환은 자신이 중정부장을 겸임하는 데 대한 부정적 여론을 알고 있었다. <5공 전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는 자신이 합동수사본부장과 중앙정보부장 직을 겸임하게 된 데 대해 항간에 구구한 낭설이 나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1767쪽) “대다수 국민이 환영의 뜻을 표한 반면 사회 일각에서는 군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등 오해로 인한 각종 유언비어의 재연을 염려하는 부정적인 일면도 있었다.”(1766쪽) 전두환도 회고록에서 “중앙정보부장 겸직과 관련해서 나돌았던 또 한 가지 억측은 내가 영향력을 더 강화하려는 욕심에서 겸직을 요구했다는 것이다”(<전두환 회고록 1>, 308쪽)라고 말하고 있다.

중앙정보부장은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또한 당시 돈으로 800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공작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자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5공 전사>에서는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의 겸임 권유를 사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 장군은 본인이 현재 합수본부장과 보안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중대한 임무를 감당하기 어려움을 밝히며 사양”(1764쪽)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거짓이다. 전두환은 중정부장 겸직을 위해 이에 반대하는 신현확 국무총리를 설득하려고 그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전두환이 중정부장직을 적극적으로 맡으려고 했던 까닭은 신현확 총리 등 일부에서 공석으로 남아 있던 중정부장을 임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현확은 전두환이 아닌 다른 민간인으로 중정부장을 임명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최규하에게 건의했다.(<신현확의 증언>, 321~324쪽)

그러나 전두환은 다른 사람이 중앙정보부장이 된다면 자신이 견제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상계엄령하에서 합수본부장이 중앙정보부를 조정 통제하게 되어있었지만 만약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나 야심이 있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오게 되면 합수부가 일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합수본부장의 권한과 업무가 매우 강력하고 중요하지만, 당시 법률상으로는 중앙정보부장의 직위가 더 높았다.”(<전두환 회고록 1>, 308쪽) 법률상 자기보다 더 상위직인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자신을 견제할 사람이 올 수도 있는 위험성을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최규하는 신현확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4월14일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했다. 기존 합수본부장에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임하게 되면서 전두환은 거칠 것이 없어졌다.

[5공 전사 - 깊이 보기](4)10·26사건 합수본부는 ‘전두환의 권력찬탈 작전본부’였다

전두환은 12·12 사태를 통해 군부를 제압했고, 합수본부를 중심으로 각종 공안기관을 장악했고, 중앙정보부장 겸임을 통해 자신에 대한 마지막 견제의 가능성을 제거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겸임 후 한 달이 조금 지난 5월17일 계엄 전국 확대라는 쿠데타를 통해 최규하를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고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10·26 이후 권력 공백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를 기반으로 공안 기관을 장악하면서 서서히 권력 찬탈의 움직임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의 권력 찬탈은 이렇듯 애초부터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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