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나에게 안겨’ ‘여기 앉아 쉬다 가렴’…바라만 보아도 편안해진다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우리를 위로하는 풍경들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두 산꼭대기 위에 웅장하게 서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Christ the Redeemer). ⓒ이승원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두 산꼭대기 위에 웅장하게 서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Christ the Redeemer). ⓒ이승원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해도, 어쩐지 위로가 되는 풍경들이 있다. 시원하게 물보라가 흩어지는 분수 아래서 사람들이 흐르는 물을 만져보고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풍경. 가파른 산등성이를 넘고 또 넘어 마침내 정상에 다다르자,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여기저기서 ‘소원을 비는 돌멩이들’을 쌓아 올린 장엄한 돌무더기를 발견했을 때. 새까만 기왓장에 하얀 펜으로 또박또박 소원을 적어 절을 짓는 공사장에 쌓아 올린 모습을 볼 때. 이렇게 한다고 해서 꼭 소원이 이뤄지는 것은 아님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소원을 비는 편지를 쓰고,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저마다 자신의 바람을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이런 풍경들의 특징은 ‘지역성’보다 ‘보편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스위스의 마터호른 산꼭대기에서도 네팔의 전통사원에도 한국의 사찰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두 손을 모으고 탑 주위를 수백 번씩 돌기도 하고, 어여쁜 돌멩이를 골라 이름 모를 사람들과 함께 ‘협업’을 하며 가지런한 돌탑을 쌓아 올린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들의 모습 자체에 매료된다. 어떤 목마름, 절실함,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맹목적인 열망에 문득 가슴이 저린다. 저들도 우리처럼,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라고, 기다리며, 열망하고 있구나.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멕시코시티 과달루페 대성당의 성모 마리아·거리의 벤치·시원한 맥주…
그냥 보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것들의 특징은 지역성보다 보편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여긴 참 치유적인 공간이네요”…내 작업실을 본 박사님의 말처럼, 나도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 구세주 그리스도상 또한 바로 그런 친근한 이미지, 누구라도 두 손 모아 소원을 빌고 싶은 이미지로 사랑받는다. 코르코바두(Corcovado)는 포르투갈어로 곱사등이라는 뜻인데, 리우데자네이루를 상징하는 이 울창한 산의 꼭대기에는 거대한 그리스도상이 두 팔 벌려 모두를 환영하고 있다. 코르코바두산은 울창한 원시림으로 유명한 티주카국립공원 내에 존재하는데, 국립공원으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면 온갖 원숭이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며 저희끼리 속닥거리고 재주를 넘으며 여행자들에게 함박웃음을 안겨준다. 코르코바두산은 710m 정도로 높지는 않지만, 인구 600만명이 넘는 거대한 도시인 리우데자네이루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천연의 전망대로 유명하다.

무려 38m에 이르는 거대한 예수상은 마치 ‘이 세상 모든 상처 입은 자들이여,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너른 품으로 이방인들을 감싸 안아준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여행자들은 저마다 최대한 팔을 넓게 벌려 예수상을 흉내내는 ‘인증샷’을 찍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 표정들 모두 하나같이 해맑고 환하다. 지상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예수상을 찍으면 마치 예수님이 슈퍼맨처럼 창공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과달루페 성당의 성모 마리아상. ⓒ이승원

과달루페 성당의 성모 마리아상. ⓒ이승원

리우데자네이루 사람들이 힘들 때 즐겨 찾는 마음의 피난처가 거대한 예수상이 있는 코르코바두산이라면, 멕시코시티 사람들이 지치고 외로울 때 찾기 좋은 마음의 안식처는 바로 과달루페 대성당이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성지순례자가 많은 성당인 이곳은 ‘세계 3대 성모 발현지’로도 알려져 있다. 멕시코인들처럼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지닌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무빙워크’를 설치, 사람들이 마리아상 옆에 몰려들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아무리 성모 마리아를 오래오래 보고 싶어도, 모두가 평등하게 무빙워크 위에 머무는 시간만큼만 바라볼 수가 있다. 과달루페의 성모 마리아를 좀 더 오래 보기 위해서는 다시 처음부터 줄을 서서 한 번 더 무빙워크에 타야만 한다. 관광객들뿐 아니라 수많은 멕시코인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라 현지인과 여행자, 토착민과 이방인의 자연스러운 어우러짐을 느끼기에도 좋은 곳이다. 빠르게 스쳐가는 무빙워크 위에서 재빨리 사진을 찍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군말 없이 무빙워크 위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나타나자마자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성모 마리아의 아스라한 미소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종교적 성상이나 기복적 행위뿐 아니라 거리의 벤치나 시원한 맥주처럼 평범한 존재도 치유의 이미지가 될 수 있다. 멕시코시티에서 만난 거리 위의 벤치가 그랬다. 사람의 뒷모습을 닮은 그 의자는 보자마자 미소를 머금게 하는 따스함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 의자의 뒷모습에 반했다. 왠지 저 의자에 앉으면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것처럼 포근한 느낌에 사로잡힐 것 같았다. 그냥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나를 있는 그대로 한껏 안아줄 것 같은 느낌. 사람의 뒷모습을 닮은 그 의자는 따스하고 아늑한 은신처처럼 보였다. 그 의자는 마치 조건 없는 받아들임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오래오래 그 자리에 하염없이 널브러져 있고 싶은 느낌, 그곳에서 한참 동안 내 삶을 돌아보고 싶은 느낌을 주는 장소들은 ‘저곳이라면 우리들의 아픔이 쉬어갈 수 있겠다’는 모종의 편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이런 따스한 치유의 느낌이 단지 아늑함이나 포근함을 주는 사물이나 장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격정적인 느낌, 오랜 아픔을 몸소 겪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통절함 또한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을 지니고 있다. 나에겐 칠레의 여성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작품이 그렇게 다가왔다.

길 위의 벤치가 이토록 아름답고 우아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멕시코시티의 벤치. ⓒ이승원

길 위의 벤치가 이토록 아름답고 우아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멕시코시티의 벤치. ⓒ이승원

우리나라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하면 주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던 파블로 네루다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정작 중남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칠레의 여성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었다. 그녀는 안데스산맥에 위치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네루다를 가르치기도 했고, 이후 세계 각지를 돌며 외교관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일은 ‘글쓰기’였다. 그녀는 ‘영혼이 육체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시(詩)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아름다운 명언을 남겼다. 네루다가 반정부 인사로 찍혀 그를 숨겨주는 사람은 모두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이 떨어진 서슬 퍼런 시국에서도 “친구를 문전박대하는 일은 절대로 할 수 없다”며 네루다를 지지했다. 그녀의 삶도 시도 모두 그렇게 고통받는 타인을 어루만지고 보듬는 따스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 ‘예술’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내가 네게 남긴 것은 밤을 지낼 등불뿐이다. 다른 여자들은 사랑과 쾌락을 찾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내가 네게 꿈의 등불을 남겼으니, 너는 그 온화한 빛을 따라 살라. (…) 다른 여자들의 쾌락의 유리는 깨져도 네가 든 등불은 깨지지 않으리라. 네 등불의 빛은 마음을 달래준다. (…) 너의 조용한 빛은 눈에서 반짝이리니, 술이나 열정으로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자들은 이렇게 물으리라.” “저 여자의 내면에 있는 불은 어떤 것이기에 그녀는 그을리지도, 연소되지도 않는 걸까?” “그들은 네가 의지할 곳 없다고 생각하고 너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너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기조차 하리라. 그러나 진실로 너는 그들 가운데 살면서 눈길로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 때 자비로운 사람이 되리라. 인간에게 대환란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돈이나 아내나 애인을 잃었을 때-그들에게는 그것들이 등불이니-그제야 그들은 네가 유일하게 부유한 자였음을 알리라, 가진 것 없고 아이도 없이 적막한 집에 있을지라도 네 얼굴은 네 등불의 빛에 휩싸일 테니까. 그러면 그들은 네게 자기들의 행복 부스러기를 권했던 일을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리라!”(<세계여성시인선: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아티초크(2016)에서). 쾌락과 욕망으로 얼룩진 세속의 등불을 이기는 작고 외로우며 영원한 등불, 그것은 바로 시인의 등불이었고, 음악의 등불이었으며, 예술의 등불이기도 했다.

마추픽추를 향한 고된 산행을 마친 여행자들에게 한 모금 구원이 되어주는 페루 맥주.  ⓒ이승원

마추픽추를 향한 고된 산행을 마친 여행자들에게 한 모금 구원이 되어주는 페루 맥주. ⓒ이승원

나의 작은 작업실을 방문하셨던 정신분석 전문가 K박사님은 들어오자마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긴 참 치유적인 공간이네요.” 책무더기와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음에도 치유의 장소로 보였나 보다. 어떤 공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 섬광처럼 어떤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집과 거리가 멂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을 작업실로 선택한 이유, 그리고 힘겨운 배낭여행이 끝날 때마다 매번 “어휴, 이제 체력이 달려서 배낭여행은 그만해야지!”라고 결심하면서도 몇 달만 지나면 온몸이 근질근질해지면서 역마살이 도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나는 온 세상을 방황하며 치유적인 공간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철새들은 생존에 최적화된 공간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해마다 수천㎞를 날아다니지만 나는 아직 그런 본능적 감각을 장착하지 못해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내가 반드시 행복해할 만한 공간을 찾아낼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긴 그냥 한시적으로 머무는 거야’라는 생각을 저절로 멈추게 하는 공간, ‘이제 그만 이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정착이란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다다르고 싶다. 나를 치유하는 공간, 나의 터전을 방문하는 손님들까지 치유하는 공간을 가꾸고 보살피고 싶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처럼, 타샤 튜더의 정원처럼, 돈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과 영혼을 쏟아부어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공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도 그곳을 사랑할 수 있는 공간. 우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나 타샤 튜더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월든 호숫가나 버몬트의 정원을 거니는 듯한 달콤한 환상을 선물받지 않는가. 나뿐만 아니라 내 공간을 찾는 사람, 내가 머무는 공간에 대하여 듣거나 읽기만 한 사람들의 지친 마음까지도 푸근해지는 장소를 만들고 싶다.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18)‘나에게 안겨’ ‘여기 앉아 쉬다 가렴’…바라만 보아도 편안해진다

너무 많은 볼 것들이 널려 있어 지금보다 더 많이 욕망하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이제 그만 욕망해도 좋겠구나’,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구나’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만드는 단순하고 꾸밈없는 공간이야말로 오래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장소들이다. 토포필리아(topophilia), 즉 장소를 향한 사랑은 곧 나 자신의 삶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며, 더 나은 장소에서 더 환한 미소로 아침을 맞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또 다른 장소를 향해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아도 그저 이 순간이 마냥 좋은 곳,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온 힘을 다해 껴안을 수 있는 치유의 공간을 일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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