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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내 마음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여행-조계산 선암사

입력 : 
2018-12-06 11: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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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수행하는 곳인데, 언제부터인가 관광지를 겸하게 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종교와 상관없이 관광객에게도 잠시나마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주는 곳이 되었다. 경내 건축물과 석탑 등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든, 사진만 찍으며 어슬렁대다 나오든, ‘절’이 주는 분위기는 ‘자신’과 맞닿아 있는 게 사실이다. 선암사 역시 여느 사찰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우리나라 사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계종이 아닌 ‘태고종’이라는 점, 삼국 시대 때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북방에서 내려온 아도화상의 핍박의 산물이라는 점 등에서 살펴볼 만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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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얘기 많은 아름다운 사찰 가을 깊은 선암사 가는 길은 무언가 허전한 분위기였다. 노란 은행과 단풍이 계절을 이야기해주고는 있지만, 색 바랜 초록과 듬성듬성해진 숲 때문일 것이다. ‘선암사’ 하면 먼저 떠오르는 풍경은 봄 매화와 승선교 홍예 뒤로 보이는 강선루를 한 컷에 담은 사진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승선교가 있는 계곡에는 인생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계곡까지 내려가 다리 근처에 서서 자신만의 앵글을 만들고 있었다. 승선교가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홍예’ 때문일 것이다. ‘무지개’를 뜻하는 홍예는 조선 건축의 중요한 형식이기도 하다. 천장을 무지개 모양으로 건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단 완성해 놓고 보면 단순하고 유려한 선이 아름답기 그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홍예를 통해 보이는 세상 풍경이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곡으로 내려가 승선교 홍예를 보면 그 뒤로 강선루와 조계산 풍경이 잡힌다.

조선 숙종 39년, 1713년 호암화상이 6년에 걸친 역사 끝에 완공한 승선교. 역사, 건축 등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에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었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 시대 때 선암사가 대형 사찰로 불법을 보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정조의 아들 순조의 탄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알려진 대로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3년(1789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서 왕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 선암사의 두 스님이 기도를 시작했다. 눌암 스님은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 스님은 대각암으로 들어가 100일 기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0년 훗날 순조가 된 ‘이공’이 태어났다. 순조의 탄생이 전적으로 스님들의 기도발 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훗날 왕위에 오른 순조가 선암사에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사람이 많으면 복이 많다’ 편액과 은으로 만든 향로, 금병풍, 가마 등을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순조 23년 대화재로 대웅전 등이 불에 탔을 때에도 해붕, 눌암, 익종 스님 등이 중창 사업에 몰두할 수 있었는데, 오늘날 아름다운 선암사의 모습이 바로 이때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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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선교 홍예와 함께 빼어난 풍경을 보여주는 강선루는 바로 누문이다. 사찰의 출입이 건축의 목적이고 대개는 일주문을 지나 위치하는데, 선암사만 이렇게 일주문 밖에 있는 점이 신기하다. 강선루를 지나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면 이윽고 선암사가 시작되는 일주문이 등장한다. 일주문의 명칭이 일주문이 된 것은 ‘옆에서 볼 때 기둥이 하나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선암사 일주문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속세 쪽에서 사찰을 향해 들어가는 쪽에는 ‘조계산선암사’, 반대 방향에는 ‘고청량산해천사’ 현판이 걸려있다. 두 현판은 서로 전혀 다른 필체로 쓰여 있는데, 이것은 선암사의 옛이름이 ‘해천사’였다는 사실을 근거하는 유적이기도 하다. ‘조계산선암사’ 글자는 세로체로 썼는데, 2행으로 쓴 점도 특이하다. 그래서, 세로로 읽으면 조계, 산선, 암사, 이렇게 읽히고, 가로체에 익숙한 사람이 왼쪽에서 시작해 읽으면 암산조, 사선계로 읽히기도 한다. 절 여행을 할 때마다 어떤 지점에서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이 나오기도 하는데, 선암사에서는 바로 이 일주문 현판 앞에서 그랬다.

만세루를 지나 대웅전 앞으로 가니 마당에 삼층 석탑 두 기가 고즈넉한 모습으로 서 있다. 두 탑이 서로 비슷하게 생긴 것을 보면 한 사람, 또는 한 그룹의 석공들이 만든 것 같다. 나중에 자료를 보니 신라 시대 때의 양식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겪은 석탑은 깨지고 닳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숱한 화재에 중창에 중창을 거듭한 가람들과 달리 이 석탑들은 선암사의 오래된 시간을 오롯하게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 석탑 주위에 ‘템플스테이’ 참가자들로 보이는 무리가 합장한 자세로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모두들 어떤 소원을 빌며 한 걸음 한 걸을 내딛고 있을까. 선암사 템플스테이는 전라남도 지역, 특히 순천 지역에서 꽤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다. 사찰의 역사, 분위기, 수많은 스토리 등의 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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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든 아니든 선암사에서 기도 한 번은 해야 하는 이유

동서3층석탑 앞에 서서 대웅전을 올려다 보면, 선암사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도 고풍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대웅전은 꾸밈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건축물이다. 소박한 지붕, 격식은 갖추었으되 단청이 보이지 않는 처마와 공포, 올곧은 모습으로 기단과 지붕을 연결해 주는 민흘림 기둥의 모습을 보노라면 친근감마저 든다. 수차례 화재와 소실, 중건과 또 다른 화재와 소실 등을 겪은 대웅전은 1824년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건축 200년을 앞두고 있는 대웅전은 실내 법당도 소박한 모습이다. 귓볼이 턱선까지 내려온 부처님 좌상과 탱화, 만불상 정도가 전부다. 내부 또한 단청이나 그 어떤 울긋불긋한 색칠도 보이지 않는다. 대중에게는 사랑과 겸손, 무념무상, 무소유, 무아지경, 무무문(無無門)을 가르치면서 정작 종교 자신은 위세와 권력과 인간을 압도하는 규모와 호사스러운 모습으로 확장하고 있는 어떤 현상을 생각해 보면, 선암사의 이런 소박함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선암사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매력이 아닐까.

대웅전 왼쪽에 있는 응향각은 사찰의 기본 가람과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경주 양동마을 같은 한옥마을에서 보았음직한 모양새다. 오른쪽 지붕이 북쪽으로 꺾여 ‘ㄱ’자형을 이루고 있는 게 그렇다. 응향각은 대웅전을 관리하는 스님이 사는 곳이다. 천년고찰이라 그런가? 대웅전 관리 스님이 따로 있고, 그분을 위한 요사채가 대웅전 바로 옆에 붙어있다는 말은 난생 처음 들어보았고 그런 장면도 생전 처음 보았다. 대웅전 오른쪽 지장전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셔놓은 전각이다. 지장보살이 석가모니에게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중생이 모두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승에서 아무리 많은 죄를 저지르며 살아도 지장보살 덕에 지옥불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허튼 생각을 하며 가람 몇 곳을 지나 원통전으로 올라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원통전은 정조가 후사를 보지 못해 초조해 하던 시절 눌암 스님이 백일기도를 올린 곳이다. 그리고 얼마 후 자손을 보았고, 그가 훗날 순조가 되었으니, 스님의 기도가 영험이 신통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손이 귀한 집안의 어른들이 원통전을 찾아 108배를 올리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모두 그런 연유일 것이다. ‘원통전’은 ‘주원융통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주원융통이란 ‘두루두루 가릴 것 없이 원만하게 통한다’는 의미로, 지금은 ‘융통성’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원통각의 주인은 관세음보살님이라 원통각을 ‘관음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선암사 관세음보살님은 특별한 이야기를 지닌 분이다.

독실한 불자나 스님들은 관세음보살님을 직접 만나는 것(친견)을 수행의 최고봉으로 여긴다. 특히 이전 시대 때는 그 바람이 너무 커서 친견에 실패한 수행자는 스스로 목숨을 던져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선암사 원통전은 1698년 호암 약휴 대사가 중창했다. 그런데 호암 스님은 자칫 중창은커녕 조계산 바위 밑에서 시신으로 발견될 뻔 했던 인물이다. 호암 또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조계산 배바위에 안거하며 백일기도에 돌입했는데, 끝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지 않자 떨어져 죽으려고 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 홀연히 나타나 호암을 붙들었는데, 그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었던 것이다. 친견 수행을 마친 호암은 산을 내려와 원통전을 중창하고 배바위에서 친견한 관세음보살을 모시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암 스님의 원통전은 1759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후 1761년 상월 스님과 사악 스님, 1824년 해붕 스님, 눌암 스님, 익종 스님 등 세 사람의 대사를 거치고, 1923년에 재중수 한 끝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격이 급하고 고집이 센 사람들은 어떤 절이든 ‘원통전’을 찾아 ‘주원융통한 자비’를 달라고 자신에게 기도해 보심이 어떨까 싶다. 필자도 이날 비슷한 기도를 했다. ‘고집불통 꼰대로 늙어가지 말고, 주원융통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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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화의 큰 맥 조계산화파의 중심 사찰 산기슭에 있는 사찰은 건축 위치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고 높이 올라갈수록 숲과 가까운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 단 한 단 오를 때마다 뒤돌아 서서 단정한 기와 지붕들을 한번 보고, 숲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걸어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오솔길을 걷더라도 원통전 위 칠전구역은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칠전구역은 진영각, 달마전, 미타전, 산신각, 그리고 응진당이 있는 곳인데,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은 진영각이다. 진영각은 뜻 그대로 큰 스님들의 인물화(진영)들을 모아둔 곳이다. 선암사 진영각에 걸려있는 진영의 주인공들은 주로 선암사 중창을 이끌었거나 큰 깨달음을 이룬 스님들이다. 중창의 시련을 겪지 않은 고찰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만, 특히 한국 불교 사찰 중 삼국시대 때 창건해서 고려와 조선,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지나온 사찰들의 중창 역사는 피와 땀, 그리고 맥을 유지하기 위한 인고와 영욕의 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암사 중창과 수행의 역사에 빛이 되었던 큰 스님들 앞에 서고, 조아려보는 것은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이다.

진영을 보며 선암사의 불화 역사를 되새겨 본다. 불화는 신앙으로서의 불교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장르를 말한다. 불탑, 불경, 불상 등 사찰에 들어갔을 때 마주보며 기원을 올릴 수 있는 신앙의 대상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불화는 그림 형식에 따라 벽에 그린 ‘벽화’, 천이나 비단에 그리는 ‘탱화’, ‘걸개’(건물의 벽, 틀에 거는 이동식 대형 벽화)와 동일한 개념의 ‘괘불’, 인물화인 ‘진영’,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압축 표현하는 ‘변상’ 등이 있다. 선암사 진영각에 들어가 ‘불화’를 생각하는 것은 선암사가 한국 불화의 커다란 맥 가운데 하나인 ‘조계산화파’가 활동한 중심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조계산화파의 화승들은 그 맥을 이어가며 누대에 걸쳐 불화를 제작했을 뿐 아니라, 같은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 등 주변 사찰을 오가며 불화 제작을 도와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96년과 1997년에 걸쳐 진행한 ‘선암사 불화 연구 조사’에 의해 확인되었고 그 연구 결과가 한국고고미술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미술사학지』 2집에 발표되었다.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계산화파 화승들은 조선 후기 화엄학의 대가로 알려진 ‘침굉대선사’와 화승 금암당 대선사의 영정, 서산 대사, 사명 대사, 지공 대사, 나옹 대사, 무학 대사 등 조선이 고승들의 진영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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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과 선암매

진영각 오른쪽으로는 각황전이 있다. 선암사 각황전은 각황전 자체보다 선암매, 선암사 매화로 더욱 유명한 지점이다. 오늘 선암사를 유유히 걸을 수 있는 것은 지금이 매화철인 4월이 아닌 덕이다. 만일 선암매가 만개했을 때 이곳에 왔다면 교통체증과 인파에 치어 스트레스깨나 받았을지도 모른다. ‘각황전과 선암매’라는 이름의 사진을 보면 오른쪽에 보이는 돌담과 지붕이 각황전이고, 돌담에 나란히 서 있는 거무튀튀한 나무들이 매화들이다. 봄이 오면 선암사 경내 곳곳에 매화가 피어난다. 그러나 ‘선암매’로 불리는 오리지널 매화는 바로 이곳 각황전 돌담의 매화를 일컫는다. 수령 약 600년의 선암매는 선암사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뿌리 깊은 나무들이다. 이 가을, 은행이 난무한 선암사 뜨락에서 만난 ‘죽은듯한 선암매’가 내년 봄 다시 그 은근한 아름다움으로 되살아난 풍경을 떠올려 보니, 무릇 생명에 대한 경외함과 생명의 연속성, 순환에 대한 벅찬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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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종은 뭐가 다르지?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일승을 본따 가정을 가지고 사는 승려들은 모두 사찰에서 나가라’고 ‘명령’한다. 요즘 세상 같으면 코웃음이나 당할 발언이겠으나 당시 대통령의 말 한 마디의 무게는 조선왕조를 뛰어넘을 정도였다. 결국 가정을 꾸린 채 수행 활동을 해 온 승려들은 모두 절에서 강제 퇴거 당했고, 그렇게 하나의 종파였던 한국 불교는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사찰을 정권에 의해 빼앗긴 태고종. 결국 대승불교를 지향하는 태고종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새 절을 짓고 수행과 대중 활동을 전개해나간다. 태고종은 자격이 있는 개인이 절을 창건해 수행할 수 있고, 그 개인은 결혼을 해 가정을 갖고 있어도 문제 없으며, 종단의 구율과 불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사유재산으로서의 사찰에 대한 권리도 유지, 승계할 수 있다. 조계종과 다른 결정적 운영 방식이다. 물론 조계종이나 태고종이나 모두 부처를 꿈꾸는, 삼라만상중생구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뿌리의 다른 형제라 할 수 있다. 조계산 선암사는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이다. ‘총림’이란 스님들이 참선수행을 하는 선원과 교육 기관인 강원, 불법에 근거한 계율 교육기관인 율원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모두 여섯 곳의 총림이 있는데, 태고종에는 태고총림(선암사)이 유일하다. 조계종의 경우 조계(조계사), 영축(통도사), 가야(해인사), 덕숭(수덕사), 고불(백양사) 총림이 있다. 총림은 그 깊이와 건축, 규모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라 이곳만 여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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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템플스테이 -휴식형 1박2일 공양 – 예불(선택) – 스님과의 차담 – 새벽 예불(자율) – 공양 – 편백숲 트레킹 – 공양 – 귀가 등 부담 없이 산사에서의 1박2일을 보낼 수 있는 기회다. 참가비 성인 1만 원.

-체험형 1박2일, 2박3일, 3박4일 등 세 가지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1박2일 프로그램에는 휴식형에 108배, 선체조 및 명상 등이 추가된다. 참가비 성인 5만 원. 2박3일 프로그램에는 소원등 만들기, 염주 만들기, 만다라 색칠하기와 명상 등이 추가된다. 참가비 성인 10만 원. 3박4일 프로그램에는 걷기명상, 좌선 등이 추가되며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다. 참가비 성인 15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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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템플라이프 절 여행을 할 때마다 물욕이 하나 일어나곤 한다. 바로 ‘발우공양’, 절밥이다. 스님들의 식단을 체험해보고 싶은 단순한 마음이지만, 그 맛이 궁금한 호기심이기도 하다. 선암사 템플라이프에 참가하면 발우공양 외에도 더 많은 사찰 체험을 할 수 있다. 참가 일정은 2시간에서 4시간짜리 당일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참가비는 식사, 트레킹 등 프로그램 내용에 따라 1만 원에서 3만 원이다. 참가 방법은 10인 이상 단체가 신청하면 된다. 템플라이프가 결정되면 사찰투어, 다도, 선체조, 좌선, 행선, 발우공양, 스님과의 대화, 편백나무숲길 트레킹, 명상 등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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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전통차야생체험관 선암사 길목에 있는 야생차 체험관이자 숙박 공간이다. 사찰과 차는 하나의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서가 깊든 역사가 짧든 대부분 사찰은 고유의 야생차 문화를 가꿔왔다. 조계산에 선암사와 송광사 등 두 곳의 묵직한 사찰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에 차 문화관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순천전통차체험관에 가면 순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야생차로 차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다. 또한 다례 체험도 가능하다. 차 만들기 체험은 5인 이상 가능하며 성인 체험비는 1만 원이다(찻잎 별매). 차 음식 체험 5000원, 다례 체험 3000원. 체험, 숙박 모두 2주 전 예약 필수.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57호 (18.12.1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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