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7일 대도는 없다

김서영 기자

195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법원에서 재판을 받다 탈주한 조세형. 경향신문 자료사진

법원에서 재판을 받다 탈주한 조세형.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의로운 도둑’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엄연히 범죄인 ‘도둑질’에 ‘의롭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요?

20년전 경향신문은 “대도 조세형이 16년만에 감옥에서 풀려났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세형은 1970~1980년대 수차례 절도 행위를 벌여 구속돼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절도범이었습니다. 1982년까지 절도로 교도소에 6차례나 드나든 전적이 있었죠. 그는 전북 전주에서 고아로 성장해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숟가락을 훔치는 것으로 범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조세형에게 큰 도둑이란 뜻의 ‘대도(大盜)’, ‘현대판 홍길동’이 수식어로 붙었던 것은 그가 주로 부유층 거주지를 털었으며 훔친 재물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밝힌 나름의 절도 원칙은 외국인의 집은 털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돈은 훔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에 부유층·고위층에 대한 반감이 맞물려 뜻밖에도 대도란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조세형씨는 1982년 이전까지 몇차례 잡혔다 풀려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오랜 수감생활을 하게 된 건 1983년 4월 법원에서 항소심 재판 도중 구치감 창문을 뚫고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100시간만에 다시 체포됐고, 햇볕도 들지 않는 청송교도소의 1평짜리 독방에서 15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1998년 11월26일 서울구치소에서 나오는 조세형.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8년 11월26일 서울구치소에서 나오는 조세형.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간이 흘러 1998년 11월26일, 법원은 조세형씨를 세상에 내보냅니다. 앞서 조씨는 석방시켜달라는 취지로 보호감호처분 재심을 청구했다 한 차례 패소한 적 있었는데요. 이후 항소심에서 원심이 깨진 것입니다. 서울고법 형사3부는 판결문에서 “조씨가 이미 50대 중반에 이르러 과거와 같이 대담하고도 민첩함을 요하는 절도범행을 할 육체적 능력이 많이 퇴화돼 재범의 가능성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석방사유를 밝혔습니다.

당시 54세였던 조세형씨는 인생의 절반인 27년을 구치소와 교도소에서 보내고 나오게 됐습니다. 서울구치소에서 나오며 조세형씨는 대기 중이던 언론과 짧은 일문일답을 했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담안선교회의 인도로 90년부터 신앙을 갖게 됐다. 그동안 600여권의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참자유를 깨달았다. 이제 육체적인 자유도 얻어 너무 기쁘다. 그런데 솔직히 신앙인으로서의 새 생활이 두렵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

- 1심 재판 때 훔친 보석들이 많이 없었다고 주장했는데

“없어진 건 분명하다. 당국의 발표보다 더 많은 장물이 집에서 압수됐다. 상부에서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다. 그때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 의적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과거를 반성하고 있다. 잘못된 행동을 스스로 깨우치는 것으로 족하다. 대도나 의적 등은 이젠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수식어다. 앞으로 크리스찬 조세형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2010년 5월12일 강도범한테서 억대 귀금속을 넘겨받아 판매를 알선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장물알선)로 구속된 조세형(72)이 현장검증을 받은 후 영등포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2010년 5월12일 강도범한테서 억대 귀금속을 넘겨받아 판매를 알선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장물알선)로 구속된 조세형(72)이 현장검증을 받은 후 영등포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그는 과연 개과천선했을까요?

2001년 조세형씨는 도쿄 시부야에서 절도를 벌이다 현지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2005년에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한 치과의사의 집에 침입해 160여만원 어치의 시계 등을 훔치다 적발됐습니다. 그는 이 건으로 검거돼 징역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2010년엔 강도범한테서 받은 수억원대 귀금속 판매를 알선한 혐의, 즉 장물알선으로 잡혀 징역 2년을 복역했습니다. 이후 2013년엔 서울 강남의 고급 빌라에서 절도를 하다 잡혀 또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또 다시 서울 용산구에서 명품 시계와 반지 등 5억원대 금품을 훔친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2015년 그의 나이 77세였으니, “절도범행을 할 육체적 능력이 많이 퇴화돼 재범의 가능성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20년전 조세형씨를 풀어줬던 법원이 참 머쓱하게 됐습니다. 재판부는 그에게서 나름 개선의 여지를 보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줬을텐데, 조씨가 이같은 기대를 배반한 셈이니까요. 인간에 대한 기대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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