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빛을 빚고 빛은 당신을 빚고

제주 | 글·사진 김형규 기자

제주 이색 미술관

클래식과 명화가 흐르는 암흑 ‘빛의 벙커’

프랑스 유리공예품이 반짝이는 지하 ‘유민미술관’

제주 서귀포시 ‘빛의 벙커’는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미술관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영상과 음향을 통해 클림트의 그림 속에 빠져든 듯한 몰입감을 준다.

제주 서귀포시 ‘빛의 벙커’는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미술관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영상과 음향을 통해 클림트의 그림 속에 빠져든 듯한 몰입감을 준다.

파리 오르세미술관은 오래된 기차역을 개조해 19세기 프랑스 회화의 성지가 됐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새로 꾸며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됐다. 두 곳 모두 한 해 수백만명이 찾는 전시공간이자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지난 16일 제주에선 20년 가까이 방치됐던 지하 벙커를 개조한 전시관 ‘빛의 벙커’가 문을 열었다. 쓸모를 다한 공간을 예술의 힘으로 되살린다는 취지는 앞서의 미술관들과 같다. 황금빛 화가 클림트의 명화로 어둠을 물들인 빛의 벙커도 명소가 될 수 있을까. 빛과 어둠을 주조해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예술공간을 찾아 제주 여행을 떠났다.

어둠은 빛을 빚고 빛은 당신을 빚고

■ 벙커 속의 클림트

빛의 벙커에서 성산일출봉까지 거리는 차로 10여분이지만 막상 찾아가기는 외딴곳(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039-22)이다. 인적 드문 올레길을 구불구불 한참 들어가야 한다. 이유가 있다. 1990년 완공된 벙커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국가 기간 통신망을 운용하던 곳이라 군의 경계가 삼엄했다. 벙커 위엔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동네 사람들도 그저 산자락인 줄 알던 곳이다. 전쟁에도 끄떡없도록 만든 벙커는 이중 지붕에 벽 두께가 3m에 이른다. 덕분에 벙커는 방음이 완벽하다. 내부는 칠흑 같은 암흑이다.

이런 적막한 어둠이 오히려 전시관으로서 최적의 조건이 됐다.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은 전시관의 특징 때문이다. 빛의 벙커는 프랑스 문화예술기업 컬처스페이스가 진행하는 아미엑스(AMIEX) 프로젝트의 세 번째 전시관이다. 아미엑스는 폐광산, 폐공장 등 산업 발전으로 도태된 공간을 활용해 화려한 영상과 음향이 결합된 미디어아트를 선보이는 전시다. 높이가 10m씩 되는 거대한 실내공간에 샤갈, 고흐, 모네, 클림트 등 화려한 색채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영상으로 도배하면서 환상적인 몰입감을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2012년 프랑스 남부 레보 드 프로방스의 폐채석장을 활용해 만든 ‘빛의 채석장’은 인구 1만5000명의 소도시에 매년 수십만명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대성공했다. 지난 4월 파리에 개장한 두 번째 전시관 ‘빛의 아틀리에’도 벌써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두루 검증받은 콘텐츠라는 얘기다. 빛의 벙커는 세 번째 전시관으로 프랑스 밖에 만들어지는 최초의 아미엑스 전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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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가로 100m, 세로 50m의 직사각형으로 구획된 어둠이 펼쳐졌다. 내딛는 걸음부터 숨소리까지 조심스러워졌다. 이윽고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사방의 벽과 바닥이 고풍스러운 벽화와 장식으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응용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막 직업 예술가가 된 청년 클림트가 몰두했던 작업들이다. 순식간에 딛고 선 공간이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의 극장과 박물관으로 변했다.

클림트의 ‘베토벤 벽화’가 길게 벽에 늘어지고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 4악장이 울려퍼지는 순간은 정확히 1902년 열린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 전시회를 재현한 것이었다. 클림트는 보수적인 기존 화단에 반대하고 장르를 아우르는 ‘총체적 예술’을 주장했던 예술가 집단 빈 분리파의 일원이었다. 빈 분리파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전 유럽을 휩쓸었던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의 중추세력이기도 했다. 전시는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연대기별로 6개 주제로 나눠 보여줬다.

전시의 절정은 물론 그의 ‘황금 시기’ 작품들이었다. ‘키스’ ‘유디트’ ‘다나에’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등 클림트의 대표작들이 차례차례 주변을 온통 금빛으로 물들였다. 고화질 빔 프로젝터 90대가 쉴 새 없이 사방 벽에 빛을 쏘아댔고 70여대의 스피커는 말러,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을 전시장 곳곳에 실어날랐다. 관객들은 노랗게 반짝이는 전시관 바닥 위를 느릿느릿 걸었다. 꿈길 걷듯 황홀한 표정들이었다. 클림트가 수없이 그렸던 오스트리아 북서부 아터 호숫가의 풍경화가 5.5m 벽에 가득 채워졌다. 벽 앞에서 걸음을 옮기면 그대로 화면 안 숲속으로 들어가는 듯 보였다. 일부 관객은 바닥에 앉은 채로 천천히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 풍경의 일부가 되어갔다. 30여분 길이의 전시 상영물이 끝나자 캄캄한 벽에는 영상을 제작한 아트디렉터들의 이름이 영화관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올라왔다. 조명이 꺼지며 사방은 다시 암흑으로 돌아갔다. 몽환적인 느낌의 잔영만 남긴 채. 관람료 1만5000원.

어둠은 빛을 빚고 빛은 당신을 빚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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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로 파들어간 미술관

빛과 어둠을 주물러 순식간에 관객을 비일상적 공간으로 안내하는 장소가 제주에 한 곳 더 있다. 섭지코지의 제주 휘닉스파크 안에 자리 잡은 유민미술관이다. 미술관은 프리츠커상을 받은 일본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명상센터 ‘지니어스 로사이’가 지난해 6월 이름을 바꿔 재개관한 것이다. 전시관 시설과 동선 일부를 개선했지만 건축의 틀은 바뀌지 않았다. 노출 콘크리트로 기하학적 선을 만들면서 주변 자연과의 조화도 중시하는 안도의 스타일 그대로다.

입구에 들어서면 한라산 백록담을 상징하는 연못이 먼저 반긴다. 이후 미술관 건물까지는 지대가 점점 낮아지며 산간, 중산간, 해안으로 이어지는 제주의 지형을 걸으며 느낄 수 있다. 걸어가며 전면을 향한 시선은 제주의 돌담과 함께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까지 한눈에 포개지는데 한국인의 평균 신장까지 고려해 건축의 높이를 결정했다고 한다. 제주의 돌과 바람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잘 꾸민 정원을 지나면 성산일출봉이 기다란 사각틀 안으로 보이는 ‘뷰파인더’ 창문이 나온다. 모든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고 가는 포인트기도 하다.

유민미술관의 전시품은 모두 아르누보 양식의 유리공예품들이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낭시 지역의 유리공예가들 작품이 다수다. 빛의 벙커에서 만난 클림트와도 관련이 깊다. 예술과 일상의 통합을 이념으로 섬세한 장식을 발달시킨 점 등 공통점이 여럿이다. 땅에서 꺼지듯 지하로 깊숙이 파들어간 미술관 건물은 입장과 동시에 침묵과 암전의 세계다. 사위가 어둡다보니 저절로 작품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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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전시품인 에밀 갈레의 ‘버섯 램프’(사진)는 천장과 벽을 검게 칠한 원통형 ‘명작의 방’에 홀로 불 밝히고 관람객을 기다린다. 식물학자였던 에밀 갈레는 열흘 만에 성장과정을 마치고 사멸하는 먹물버섯의 생애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돔 형제의 ‘개양귀비 무늬 화병’은 색유리를 여러 겹으로 겹쳐 만들었는데, 저녁 노을을 표현한 분홍빛은 물론이고 꽃에서 떨어지는 이슬까지 유리를 한 방울씩 녹여 표현한 세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관람료 1만2000원.

■ 폐가를 개조한 서점과 낮술 마시기 좋은 식당

빛의 벙커와 유민미술관을 여행하며 함께 들를 만한 곳이 있다. 먼저 빛의 벙커에서 차로 5분 거리에 가수 요조가 운영하는 서점 ‘책방무사’가 있다. 15년간 방치된 폐가를 정성 들여 개조한 서점은 아기자기 잘 꾸며져 있다. 시·소설·산문 등 문학 서가가 제일 크고, 페미니즘 서가도 비슷한 크기다. 한쪽 책상엔 책 표지에 뒷모습이 그려진 책만 골라 진열해놓고 ‘뒷모습전’이라는 팻말을 붙여놨다. 최근 타계한 불문학자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부터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줄리언 반스의 소설 <연애의 기억>까지 책방 주인의 취향이 얼추 읽힌다.

가수 요조가 운영하는 책방무사

가수 요조가 운영하는 책방무사

유민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릴로’는 프랑스에서 영화와 언어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20대 사장이 지난 7월 문을 연 프렌치 비스트로(간단한 음식과 술을 파는 대중음식점)다. 빵 위에 버터나 잼, 치즈, 채소, 고기 등을 얹어 먹는 프랑스식 오픈 샌드위치인 ‘타르틴’이 주메뉴다. 소고기와 채소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 비프스튜도 맛있다. 와인과 맥주를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어 낮술을 즐기는 젊은 손님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프랑스에서 공수한 엽서와 식기 등도 판매한다. 작은 섬이라는 뜻의 가게 이름답게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 가듯 들르기 좋은 곳이다.

제주 성산읍 종달리의 프렌치 비스트로 '릴로'의 타르틴(프랑스식 오픈 샌드위치)

제주 성산읍 종달리의 프렌치 비스트로 '릴로'의 타르틴(프랑스식 오픈 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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