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사막의 거대한 촛불이 속삭인다…힘들어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나에게 여행이란, ‘나를 넘어선 나’를 찾는 것

페루 파라카스의 칸델라브라.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사막이 있고, 그 사막 위에 촛대 모양의 지상화가 아로새겨져 있다. 진짜 타오르는 불이 아니기에 오히려 영원히 켜져 있는 듯하다. 칸델라브라를 떠올리면 내 어두운 가슴 속에 촛불 하나가 켜지는 느낌이다. ⓒ이승원

페루 파라카스의 칸델라브라.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사막이 있고, 그 사막 위에 촛대 모양의 지상화가 아로새겨져 있다. 진짜 타오르는 불이 아니기에 오히려 영원히 켜져 있는 듯하다. 칸델라브라를 떠올리면 내 어두운 가슴 속에 촛불 하나가 켜지는 느낌이다. ⓒ이승원

“선생님, 저는 20개국 여행이 목표입니다!” “작가님, 지금까지 몇 개국이나 가보셨어요?” “가장 오래 떠나 본 기간이 며칠이세요?” 독자들은 가끔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은 도시를 다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정작 나는 ‘몇 개국을 여행했는지’ 계산해 본 적이 없다. 여행에서만은 그런 양적인 문제, ‘숫자’와 관련된 강박을 가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계속되어온 숫자와의 씨름에 이미 지쳐있지 않은가. 조회 수와 판매량, 성적과 등수, 키와 몸무게, 지지율과 가성비, 날짜와 연차, 연봉과 부동산 가격에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삶이 너무도 피곤하지 않은가. 나는 여행할 때만이라도 ‘숫자’를 잊고 싶다. 그러다 보니 여행할 때는 날짜와 요일마저 잊어버릴 때가 있다. 날짜와 요일조차 잊은 채 여행 그 자체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을 때, 여행이 정말 성공했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의 시곗바늘 위로 일분일초를 아쉬워하며 바쁘게 뛰어다닐 때는 느끼지 못하는 해방감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으로부터의 해방감, 정해진 공간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내가 여행을 멈출 수 없는 진짜 이유다. 나에게 ‘얼마나 많은 나라에 가보았나’라는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시간의 장으로부터, 공간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하는 마음의 문제로 다가온다.

“남미 여행에서 어디가 제일 좋으셨어요?” “유럽에서 제일 인상 깊은 도시는 어디인가요?” “한 도시만 콕 집어서 추천해주신다면, 어디가 제일 좋으셨어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도 나는 매번 난처해진다. 여행지를 마음속에서라도 1위, 2위, 3위 식으로 줄 세워 등수를 매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색깔을 저마다의 이유로 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빨주노초파남보’ 중 어느 색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당황스러운 것처럼. 엄마 아빠가 모두 좋은 아이에게, 비교조차 해본 적 없는 아이에게, ‘엄마 아빠 중 누가 더 좋냐’고 묻는 질문처럼. 가끔은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물론 마추픽추도 아름답고, 이구아수 폭포도 경이로웠지만, 저는 페루의 모라이 유적지로 가는 길, 이름 모를 가옥 한 채가 자꾸 떠오릅니다. 그냥 언덕 위의 집이었어요. 아마 이제 ‘혼자 찾아가 보라’고 하면 찾아가지 못하겠지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아주 작고 평범한 집이니까요. 구름조차도 결코 서둘지 않고 천천히 흘러가는 곳, ‘어디로 가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깜빡 잊게 하는 곳,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집이지만 어쩐지 문을 똑똑 두드리고 차 한 잔 얻어먹고 싶어지는 곳. 그런 장소가 제 마음을 멈추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인지, 무엇 때문에 유명한지, 이런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곳이 제 마음을 뒤흔드는 아름다운 장소들이지요.

교통 체증에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할 때,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지하철을 탔다가 지하철 승객이 너무 많아 ‘몸싸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내리는 역을 놓쳐버렸을 때, 나는 묻게 된다. 우리는 저마다 어디로 가기 위해 이렇게 좋은 날 이 심각한 교통 체증을 견디며 꾸역꾸역 거리로 나가는 것일까. 저마다의 목적지는 있겠지만 과연 그 목적지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을까. 우리가 이렇게 바삐 살아가는 동안 우리 자신도 모르게 놓치는 생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목적지 중심의 사고, 목표 중심의 사유는 ‘과정은 아무래도 좋아’라는 편의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조금 더 느리게 살고 싶기에 ‘목적지’뿐 아니라 ‘가는 길’도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삶도 여행도, 인간관계도 일도, 조금 더 느려도 좋으니 ‘목표’만이 아닌 ‘과정’이 탄탄하고 진실했으면 좋겠다. “여행지에서 뭐가 그렇게 좋았어요?” “페루에서는 어디가 제일 좋았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가는 길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마추픽추만이 아니라 마추픽추로 가는 길의 아름다움을, 이구아수 폭포만이 아니라 이구아수 폭포에 가기 위해 들렀던 그 모든 이름 모를 장소들의 아름다움을.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아마도 일생에 단 한 번뿐일, 낯선 길을 그냥 무작정 걷는 몸짓의 아름다움을.

바삐 살아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놓치는 생의 아름다움
이름 모를 장소들의 아름다움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과정의 아름다움
아마도 일생에 단 한 번뿐일

낯선 길을 그냥 무작정 걷는
몸짓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여행이다

아름다운 목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도 좋다.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주 작은 장소여도 좋다. 여기가 어딘지조차 잊게 만드는 장소의 고즈넉한 아름다움, 길치인 내가 아무리 다시 찾아오려고 해도 틀림없이 헤매다가 다시 못 찾을 것이 뻔한 장소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나는 강인한 사람이니까’라는 터무니없는 자신감 때문에 고산병의 무시무시한 고통을 제대로 알게 해 준 쿠스코의 험준함과 가파름조차도, 내게는 여행지에서 경험한 ‘과정의 아름다움 컬렉션’의 일부다. ‘나는 강인하다, 웬만한 고통은 견뎌낼 수 있다’라는 무지막지한 자기 암시보다는 ‘다음에는 꼭 고산병 약을 먹고 가야겠다!’라는 현실적인 대비책이 훨씬 성숙한 태도임을 이제는 안다. 낯선 장소의 아름다움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에서 정작 찾아낸 것은 ‘나조차도 몰랐던 나’일 때, 그럴 때 우리는 ‘장소의 수집 욕구’를 뛰어넘는 더 깊은 욕망의 차원과 만날 수 있다. 나는 장소를 수집하고 싶지 않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목표도 아니다. ‘인증샷’을 전혀 남기지 않아도 좋다. 그때 그곳에서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감성의 근육’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깨달음, 지극히 사소한 미소, 어쩌면 단 한 번뿐일 안타까운 스쳐감만으로도 여행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선물한다는 것을.

페루의 모라이 유적지로 가는 길에서 만난 한 채의 집. 신기하게도 페루를 떠올리면 이 이름 모를 사람의 집이 떠오른다. ⓒ이승원

페루의 모라이 유적지로 가는 길에서 만난 한 채의 집. 신기하게도 페루를 떠올리면 이 이름 모를 사람의 집이 떠오른다. ⓒ이승원

여행지에서 어쩌면 나는 ‘장소’보다도 ‘사람’을 더 유심히 바라볼 때가 많다. 관광객들에게 기념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받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불쾌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또한 여행지의 가지각색 풍경 중의 일부가 아닐까. 아마 저분을 볼 수 있는 것은 이번 생에 마지막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 때.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무조건 애틋해진다. 왠지 한 번이라도 다가가 밑도 끝도 없는 수다를 떨고 싶어진다. 여기가 어디인지 몰라도 좋으니 그냥 저 사람과 다정하게 수다를 떨고 싶어지는 순간. 내가 왜 이렇게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것일까, 흠칫 놀란다. 나는 어쩌면 평소의 ‘나라고 믿었던 내 모습’이 오랫동안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억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을 무조건 싫어할 정도로 마음을 꽁꽁 싸매고 살아온 지난날이 얼마나 자기방어적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기시감을 맛볼 때도 있다. 페루의 이카 사막 한가운데서 나는 이상한 기시감을 맛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사막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꿈속에서 본 것처럼, 오랫동안 상상해 오던 이미지가 현실 앞에 나타난 것처럼, 이카 사막은 기이하게 친숙하고 따스했다. 이런 곳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어떤 장소를 설명할 때 꼭 이런 것을 묻는다. “거기 랜드마크가 될 만한 곳이 없나요?” “지금 어디세요? 커다란 간판이나 건물 로고 같은 것 보이지 않나요?” 그런데 사막에는 랜드마크가 없다. 사막의 당혹스러움은 바로 그것이다. ‘여기가 어디쯤이다’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 그 알 수 없음이 사막의 신비와 매혹을 담당한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피에스(GPS)를 켜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곳은 ‘목적지 중심의 사고’를 멈추게 한다. 꼭 여기가 어디인지 몰라도 될 것만 같은 느낌. 꼭 멋지고 아름다운 곳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 그냥 내가 서 있는 이 사막의 한가운데가 지금 내가 꼭 있어야 할 안성맞춤의 자리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그 순간이 좋았다.

[정여울의 라틴아메리카 기행](17)사막의 거대한 촛불이 속삭인다…힘들어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파라카스의 칸델라브라(Paracas Candelabra)는 물개섬이라 불리는 바예스타스섬으로 배를 타고 가는 중에 갑자기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가슴에 남아 있다.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사막이 들어앉은 것도 신기한데 그 위에 그야말로 촛대(Candelabra, 스페인어로 촛불 또는 촛대)를 꼭 닮은 거대한 문양이 마치 거인이 장난삼아 사막 위에 휙 낙서를 한 것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칸델라브라는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워 머릿속을 빠른 속도로 강타하고 급히 스쳐 지나갔지만, 다녀온 뒤 몇 달 뒤에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절경 중의 하나가 되었다. 끝간 데 없는 바다 위에 난데없는 사막, 그리고 그 사막 위에 거대한 촛불이 켜져 있는 느낌이다. 진짜 타오르는 불이 아니기에 오히려 영원히 켜져 있는 느낌으로 남아 있는. 칸델라브라를 생각하면 내 어두운 가슴 속에서 촛불 하나가 켜지는 느낌이다. 그 사막 위의 촛대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어디서든 영감의 촛불은 켜질 수 있어. 사막 위에서도, 바다 한가운데서도, 영감의 촛불은 켜질 수 있어. 그러니 포기하지마. 글쓰기로 너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작은 촛불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네 가슴 속에서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글쓰기의 꿈을.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휴대폰 속에 고이 저장해 둔 칸델라브라의 사진을 꺼내어 쓰다듬어 본다. 마치 한붓그리기를 하듯 촛불을 닮은 칸델라브라의 윤곽선을 하나하나 따라 그려본다. 그리고 오늘도 힘겹지만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좋은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그 글이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사막 위의 난데없는 촛불이 되어 그가 오늘도 견디어야 할 생의 어둠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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