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만드는 시대에 마음을 여는 시,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이영경 기자
4년 만에 여덟번째 시집 <파일명 서정시>를 펴낸 나희덕 시인. 창비 제공

4년 만에 여덟번째 시집 <파일명 서정시>를 펴낸 나희덕 시인. 창비 제공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그들이 두려워한 것은/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파일명 서정시’)

나희덕 시인(52)이 펴낸 여덟번째 시집의 제목은 <파일명 서정시>(창비)다. ‘파일명 서정시’는 냉전기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를 감시하며 작성한 자료집의 이름에서 따왔다. 서정시마저 감시와 검열의 대상이 되는 시대의 어둠, 그런 시대에 시가 해야할 역할에 대해 시인 스스로 묻고 답을 찾는 과정을 담았다. 대표적 서정시인으로 꼽히는 나희덕은 “시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게 1차적 숙제였다면, 이젠 내 안의 문제들을 넘어서 고통스러운 현실, 바깥에 눈을 돌려 귀 기울이고 그런 목소리를 듣고 대신 앓는 시를 쓰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세월호 참사, 위안부 문제, 여성들이 겪는 폭력 등 사회적 아픔을 그는 이번 시집에서 온몸으로 앓는다.

“증인 B: 할 말……말이 있지만……그만……그래도……할 말이……해야 할 말이……정신없이……살아나오긴 했지만……우리 반에서……저 말고는……아무도……구조되지 못했……친구들도 살 수 있었을……아무도……저 말고는 아무도……”(‘문턱 저편의 말’)

세월호 참사는 이 시대 예술인들에게 지울 수 있는 흉터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나희덕 역시 이번 시집에서 세월호 참사를 다룬 시를 여러 편 선보이는데, ‘문턱 저편의 말’은 실제 시인이 세월호 재판에 들어가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쓴 시다. 시인은 “아이들이 가진 괴로움, 살아남은 자책감과 슬픔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실제 차분하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듣는 것 자체가 괴로워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들렸다”며 “현실의 고통이 문학적 언어로 전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시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흘러내리는 말. 모래 한 줌의 말…뼛속 깊이 얼움이 박힌 말.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말. 감전된 말. 화상 입은 말. 타다 남은 말. 재의 말”이다.

시인은 ‘문단 내 성폭력 폭로’와 미투 이후 터져나온 여성들의 고통과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시집을 여는 시 ‘눈과 얼음’은 미투 폭로를 계기로 쓰인 시로 “고드름이 떨어져나갔다/내 몸에서//시위를 떠난 투명한 화살은/아파트 20층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이제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을 알게 되리라”고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노래한 시 ‘들린 발꿈치로’에선 “여기가 어디지요?/반쯤 썩어문드러진 입술로 묻습니다…들린 발꿈치로/한번도 온전히 제 땅을 밟고 서보지 못한 발꿈치로”라고 노래한다.

이번 시집을 쓰는 동안 나희덕은 개인적으로도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병을 앓던 아버지는 지난해 그의 생일 바로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한 개의 씨앗에서/삶과 죽음은 두개의 떡잎처럼 돋아났다//내가 생일을 맞이한 날에/아버지의 죽음은 무럭무럭 자라나 심연을 완성했다//아버지가 받아 안았던 딸이/중년이 되어 아버지의 시신을 받아 안은 그날에”(‘어떤 피에타’)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만드는 시대에 마음을 여는 시,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이밖에도 시집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대의 소통, 정보가 허공의 ‘클라우드’에 집중되는 디지털 시대에 대한 통찰, 대학에 대한 비판 등도 담아냈다. 사회에 만연한 죽음과 폭력은 때론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지만, 그렇기에 시인은 더욱 더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Today`s HOT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불타는 해리포터 성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