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세월호…이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앓다

이영경 기자

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

블랙리스트·세월호…이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앓다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파일명 서정시’)

나희덕 시인(52)이 펴낸 여덟번째 시집의 제목은 <파일명 서정시>(창비)다. ‘파일명 서정시’는 냉전기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체를 감시하며 작성한 자료집의 이름에서 따왔다. 서정시마저 감시와 검열의 대상이 되는 시대의 어둠, 그런 시대에 시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시인의 질문을 담았다. 나희덕은 “시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게 1차적 숙제였다면, 이젠 내 안의 문제들을 넘어서 고통스러운 현실, 바깥에 눈을 돌려 귀 기울이고 그런 목소리를 듣고 대신 앓는 시를 쓰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세월호 참사, 위안부 문제, 여성들이 겪는 폭력 등 사회적 아픔을 그는 이번 시집에서 온몸으로 앓는다.

“증인 B: 할 말……말이 있지만……그만……그래도……할 말이……해야 할 말이……정신없이……살아나오긴 했지만……우리 반에서……저 말고는……아무도……구조되지 못했……친구들도 살 수 있었을……아무도……저 말고는 아무도……”(‘문턱 저편의 말’)

세월호 참사는 이 시대 예술인들에게 지울 수 있는 흉터와도 같은 사건이었다. 나희덕 역시 이번 시집에서 세월호 참사를 다룬 시를 여러 편 선보이는데, ‘문턱 저편의 말’은 실제 시인이 세월호 재판에 들어가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쓴 시다. 시인은 “아이들이 가진 괴로움, 살아남은 자책감과 슬픔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실제 차분하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듣는 것 자체가 괴로워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들렸다”며 “현실의 고통이 문학적 언어로 전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시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흘러내리는 말. 모래 한 줌의 말…뼛속 깊이 얼음이 박힌 말.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말. 감전된 말. 화상 입은 말. 타다 남은 말. 재의 말”이다.

4년 만에 여덟 번째 시집 <파일명 서정시>를 펴낸 나희덕 시인.    창비 제공

4년 만에 여덟 번째 시집 <파일명 서정시>를 펴낸 나희덕 시인. 창비 제공

시인은 ‘문단 내 성폭력 폭로’와 미투 이후 터져나온 여성들의 고통과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시집을 여는 시 ‘눈과 얼음’은 미투 폭로를 계기로 쓰인 작품으로 “고드름이 떨어져나갔다/ 내 몸에서// 시위를 떠난 투명한 화살은/ 아파트 20층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을 알게 되리라”고 말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을 노래한 시 ‘들린 발꿈치로’에선 “여기가 어디지요?/ 반쯤 썩어문드러진 입술로 묻습니다…들린 발꿈치로/ 한번도 온전히 제 땅을 밟고 서보지 못한 발꿈치로”라고 노래한다.

이밖에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대의 소통, 정보가 허공의 ‘클라우드’에 집중되는 디지털시대에 대한 통찰, 대학에 대한 비판 등도 담아냈다. 사회에 만연한 죽음과 폭력은 때론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지만, 그렇기에 시인은 더욱더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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