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법률가들’ 펴낸 김두식 경북대 교수
광복~한국전쟁, 법률가 3000여명 자료수집…4년 만에 탈고

김두식 경북대 교수가 20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
“한국 법조계의 뿌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단하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법률가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이 지배한다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ry)’를 그동안 주장해왔지만, 뿌리를 찾아보면 시험에 안 붙은 사람도 많았고 빈약했습니다.”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신작 <법률가들>(창비)을 내놓았다.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법조계의 병폐와 치부를 파헤쳤다면, <법률가들>은 병폐의 뿌리를 탐구한 역작이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한국법관사, 한국사법사 등 공식 기록과 관보, 자서전, 판결문 등을 참고해 법률가 3000여명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4년 만에 책을 완성했다. 20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창비 사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 교수는 말했다. “과연 그 시대에 훌륭한 판검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김 교수는 1945년 이후 법조계에 몸담은 사람들을 5가지 그룹으로 나눴다. 일제시대 활동한 원로그룹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그룹이 중심이 된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고등학교 사법과에 합격한 인물은 1그룹으로, 박정희시대 법조계를 주도했다. 김영재는 ‘반성해서 망한 사람’의 대표격이다. 경성제대를 나와 고등시험 사법과까지 붙었지만, 해방 이후 조선법학자동맹에 가입했다 ‘법조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월북 이후 행방불명이 된다. 반면 손꼽히는 친일재력가 집안 출신의 민복기 전 대법원장은 한국전쟁 시기 은신하며 위기를 넘긴 후 박정희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에 대법원장까지 지냈다. 김 교수는 “과거를 반성하고 돌이킨 사람은 죽거나 망해서 없어졌고, 개인의 안위만 추구한 사람은 영광을 누렸다”고 말했다.
2그룹은 조선변호사시험 출신 변호사들로 해방 후 대거 판검사로 임용됐다. 3그룹은 일본어로 진행된 재판에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했던 이들이다. 경력 7년 이상인 서기들은 별도의 시험 없이 판검사에 임용되는 특혜를 누렸다. 서기 출신 법조인은 1946년 기준 판사의 30%, 검사의 50%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대법관을 지낸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의 부친 이홍규가 대표적인 3그룹 법조인이다. 이들은 자신의 경력에서 오는 ‘열등감’을 만회하기 위해 실적에 집착한다. 대표적 ‘사상검사’ 오제도는 ‘관제 빨갱이’를 생산하며 공안검사의 기원이 된다.
4그룹은 해방 이후 각종 시험에 합격해 법조계에 입문한 법률가들인데, 김 교수는 법조계 최대 스캔들로 평가되는 ‘이법회(以法會)’ 출신에 대해 처음으로 소상히 밝힌다. 이법회는 1945년 8월14일 시작된 조선변호사시험에 응시했다 해방을 맞으면서 감독관이 사라지자 응시자들이 결성한 단체다. 고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방보다 합격이 더 중요했다. 이들은 합격증을 요구했고, 106명이 시험도 없이 합격증을 받았다. 이 교수는 “전두환 정권에서 대법원장 자리에 오른 유태흥과 인권 변호사 홍남순이 이법회 멤버였다”고 말했다.
이 시절 시작된 병폐는 법조계 적폐의 뿌리가 됐다. 일본어로 진행된 재판에 필요했던 서기와 통역관은 법조 브로커의 시초가 됐다. 김 교수는 “돈도, 사람도, 제도도 충분치 않았던 시절 법원 운영비가 없어서 브로커가 준 ‘용돈’을 받았다”며 “1990년대 후반 법조비리가 터지기 전까지 판검사들 사무실에서 현금이 돌아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재 터져나온 사법비리에 대해서는 “지금껏 사법부의 독립을 주로 이야기했다면 이젠 법관의 독립이 필요하다. 헌법이 부여한 권한대로 법관 개개인이 독립해야 한다”며 “1990년대 법조비리가 돈 안 받는 법원을 만들었다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법관의 독립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검찰 주도의 사법부 개혁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김 교수는 “정권 출범 당시 검찰 개혁이 중심이 됐는데 검찰 개혁은 사라지고 검찰이 주도하는 법원 개혁이 됐다. 단시간에 검찰이 주도권을 갖게 된 상황이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