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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감동 웰에이징 관찰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입력 : 
2018-11-14 18: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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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우리나라 인구는 약 5200만 명이다. 그중 65세 이상은 14.3%고 노령화 지수는 110.5다. 유소년 인구가 100명일 때 노인 인구가 110.5명이라는 말이다. 기대 수명은 82.4년이다. 법적 노인인 65세 이후에 20년은 더 살고 싶어 하는 세대의 바람이 반영된 수치다. 웰에이징의 출발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웰에이징은 고령화 시대가 만든 신조어로 ‘좋은 늙음’을 뜻한다. 좋은 늙음이 무엇일까? 내 주변은 고사하고 나 역시 서서히 늙어 가고 있고, 언젠가 아니, 곧 노인이 될 텐데 그때 난 어떻게 살아야 ‘웰에이징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령화 선진국 일본에서 그 정답의 일단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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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번 악기를 연습하신단다. 상당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취미를 계속한다는 것이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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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년은 어떤 모습일까? 훗날 할머니가 된 나는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분명히 다가올 미래인데도 왜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까. 늙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65세가 넘은 우리 엄마를 생각해 본다. 내 기억 속에선 언제나 쌩쌩하고 젊은 우리 엄마. 그 엄마가 어느 날 한의원에 오셨다. 딸도 볼 겸, 침도 맞기 위한 방문이었다. 엄마지만 환자는 환자. 자연스럽게 차트를 들여다보는데, ‘노인 할인 적용’ 항목에서 잠시 눈길이 머물렀고 생각도 정지됐다. 침을 맞기 위해 침상으로 걸어가는 엄마의 등은 언제 저리 굽어 버렸는지, 그동안 나는 왜 엄마의 그런 변화를 보지 못했는지, 엄마가 집으로 가신 뒤에도 한동안 나는 엄마의 변화를 생각하며 앉아 있었다.

‘웰에이징’에 관한 TV 다큐멘터리 촬영에 동행해 달라는 방송 제작사의 제의를 받았을 때, 나는 ‘웰에이징이 대체 뭐지?’ 하고 반문했다. 한의사로서, 딸로서, 그동안 나의 관심사는 ‘안티에이징’이었다. 노화는 곧 질병이자 죽음이기에, 어떻게 하면 늙지 않고 젊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명제에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화는 빠르든 느리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숙명이다. 예쁘게 늙는다고 안 늙는 것도 아니다. 주름이 덜한 노인이든 허리가 꼿꼿한 노인이든, 노인은 노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잘 늙자’, ‘곱게 늙자’라는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과정과 방법, 실천과 성과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웰에이징이라는 개념이 생성된 것이다.

사실 웰에이징에 대한 고민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시작되었다. 노령화 사회가 일찍 찾아온 일본이 제일 빨랐고, 수치상 고령화 시점은 일본보다 늦지만 일본 이상의 성과를 낸 나라들도 많다. 엄마가 다녀가시고 내 마음이 ‘실버’에 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웰에이징의 모범 사례 촬영에 동행하자’는 제작진의 제안은 ‘땡큐!’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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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 아랫쪽 삼각마당과 파란지붕이 바람의 언덕, 이세하라시의 길목 요코하마시
▶‘바람의 언덕’에서 만난 젊은 언니 오빠들 웰에이징 촬영 목적지는 일본 도쿄 근처 이세하라시에 있는 마을 공동체 ‘바람의 언덕’이다. 로케이션은 지난 늦여름, 태풍의 눈이 일본 열도 상공을 지나갈 즈음이었다. 김포발 하네다행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각양각색의 여행자들은 각자 자리를 찾아가 착석하고 안전벨트를 매고, 두리번거리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책이나 잡지를 꺼내며 앞으로 다가올 세 시간 남짓 하늘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웰에이징이라는, 다소 낯설고 흥분된 주제의 여행길이라 그럴까, 들뜬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코디네이터가 반겨준다. 우리는 요코하마를 거쳐 ‘바람의 언덕’이 있는 이세하라시에 도착했다. 일본의 대부분 도시가 그러하듯 이세하라시 또한 깨끗함과 고요함이 가득했다.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니 쓸쓸한 적막감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곤니치와!” 다음 날 아침, 바람의 언덕 본격 취재에 앞서 우리는 방송에 출연할 주인공들과 첫인사를 나누었다. 바람의 언덕 측에서는 이사장인 가와카미 씨와 건장한 남성 노인들이 나오셨다. 가와카미 씨는 곱고 예쁜 할머니였고, 남성 노인들은 ‘독수리 오형제’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건장해 보였는데 ‘코코 이키마쇼-카이(ここ 行きましょう-かい 우리 함께 가요 회, 이하 코코)’ 회원들이었다.

바람의 언덕은 크게 ‘고요한 곳’과 ‘요란스러운 곳’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고요한 곳은 우리로 치면 일종의 요양원이나 양로원 같은 시설로, 이곳에 입주한 노인들이 자고 먹으면서 치료나 요양에 집중하는 곳이다. 다른 한 곳은 바람의 언덕 회원들이 만나서 토론도 하고 근황도 나누고, 노인 관련 최신 정보도 주고받는, 한마디로 웃고 떠드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코코테라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코코테라스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독수리 오형제가 소속되어 있는 코코 회원들로 그들은 이 지역의 터줏대감들이다.

코코는 일종의 자원봉사단 모임으로 마을의 평화와 균형을 위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다. ‘코코’란 특정 인물이나 대상을 지칭하는 게 아닌, ‘여보세요!’ ‘이보게들!’처럼 불특정 다수를 부르는 일종의 대명사다. “여보게, 우리 함께 가세!” 이 얼마나 정겹고 가치 있는 인사인가! 암튼 코코테라스는 바로 코코 회원들이자 마을을 잘 아는 노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 중이다.

우리는 자리에 앉자 마자 선물을 하나씩 받았다. 으잉? 우린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아이고, 초면에 이게 웬 부끄러움. 선물은 손으로 만든 밤 과자였다. 한국도 그렇듯이 일본 또한 밤 수확이 한창이었는데, 직접 재배한 밤을 수확해서 손수 씻고 삶고 빚어 포장까지 한 수제 밤 과자였다. 우리로 치면 율란쯤 될까? 선물을 받고 재배부터 포장까지 직접 하신다는 말씀을 들으며 나는 ‘웰에이징의 조건’ 중 한 가지를 자연스럽게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고 마무리까지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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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날갯짓이 바람의 언덕을 만들다 바람의 언덕 기부자 츠자키 가와카미 씨는 작은 체구, 동그란 얼굴 그리고 표정이 귀여운 분이다. 이 분이 바람의 언덕 이사장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람의 언덕의 출발은 가와카미 씨가 마을의 독거 노인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엔 혼자, 얼마 후 둘, 셋, 그리고 마을에 노인이 늘어나면서 그의 일은 마을 시스템으로 성장했다. 독거 노인 돌봄이 가와카미 씨 개인 활동에서 마을 시스템으로 발전하자 수혜자도 늘어났다. 돌봄 서비스를 받은 분 가운데 ‘츠자키’라는 이름의 할머니도 계셨다. 츠자키는 훈훈하고 체계적인 마을 분위기 속에서 편안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자신의 별로 떠나셨다. 그녀는 자신의 집터를 마을에 기증했고, 그곳이 지금의 ‘바람의 언덕’이 되었다. 가와카미 씨는 자신이 사용하는 이사장실에 츠자키 씨를 기리는 의자를 마련해 두었다. 그리고 아침마다 그 자리에 앉아 츠자키

씨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또한 무언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그 의자에 앉아 “츠자키씨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물어보기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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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테라스는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좋다는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의식을 다져나갈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이다, 노인들 모시러 다니는 전용차
▶‘에이징 인 플레이스’ 내 마을 내 이웃, 익숙하고 편한 것 마을 노인 돌봄 시스템으로 발전한 바람의 언덕은 두 가지 형태로 운영된다. 첫째, 이곳에 입소해서 지내는 방식이다. 먹고 자고 쉬는 일을 모두 이곳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둘째는 자택에 머무는 노인들을 위한 하루 돌봄(데이케어), 음식 배달 등의 서비스다.

바람의 언덕 입소자는 전부 마을 사람들이다. 서로 이미 잘 아는 사이라는 말이다. 낯설지 않고, 밀고 당길 일도 없으며, 들어오는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맘 편하게 지낼 수 있다. 돌봄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마을에서 수시로 마주치던 이웃들이니, 평소처럼 편안하게 인사하고 그의 성품에 맞춰 돌봐드리면 된다. 돌봄 스태프들 가운데는 노인도 상당수 있다. 그들은 건강한 사람들로 또래 노약자나 초고령 선배 노인을 돕고 치매 환자도 돌봐드린다. 그들에게 훗날 바람의 언덕에 들어올 의사가 있는지 물으니 대답은 명쾌하다.

“선생님도 늙고 병들면 바람의 언덕에 들어와 지낼 생각인가요?”

“물론이지요! 내가 아는 사람들의 편안한 손길을 받으며 함께 지내고 싶어요.”

굳이 잠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베푼 만큼 돌아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웰에이징을 사는 그들은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의 언덕에 거주하는 분 가운데 ‘시바타’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있다. 그녀의 집은 바람의 언덕 코앞인데 굳이 바람의 언덕에 들어와 지내고 계셨다. 꼭 그래야 할까? 왔다 갔다 하며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궁금해 하던 차에 마침 ‘점검차’ 당신 집을 방문하신다고 하길래 냉큼 따라 나섰다. 시바타 할머니한테 자택 방문은 산책을 겸한 정기적 발길이라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람의 언덕에 들어와 사는 노인 대부분은 치매, 그것도 중증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의 일상을 관찰하면 누구도 중증 치매 환자로 보이지 않는다. 즐겁게 대화하고 하하호호 웃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소개를 하면서 “나 치매야”라고 거침없이 던지곤 한다. 마치 “어쩌지? 감기가 와 버렸네”, “나 땅콩은 못 먹어, 알레르기가 있거든” 등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불편함 정도로 치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그분들이 중증 치매 상태에서 그토록 자연스러운 일상을 유지하는 모든 이유를 당장 알 수는 없다. 단, 발병이 되기 전부터 코코테라스에 모여 대화하고 토론하고 수다 떨고 웃는 생활을 해 왔고, 발병 후에도 마을 돌봄 시스템 안에서 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치매나 노화의 진행 속도가 늦춰진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은 되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 치매 노인 대부분이 뒷방으로 들어가거나 대화 시스템에 없는 요양원에서 묵언 세월을 보내며 증세가 악화되는 상황을 생각하니 그 대비에 먹먹해졌다. 동시에 웰에이징의 두 번째 조건은 ‘상호 작용’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다. 웰에이징을 누리고 싶다면 노인이 되어 새 친구를 만들려 하지 말고, 지금 50대든 40대든, 70대 때까지 수다를 나눌 친구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그런 친구가 있던가 더듬어 보던 중, 우리는 시바타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시바타 할머니와 바람의 언덕

시바타 할머니 댁에 들어선 나의 첫 반응은 감탄사였다. “우아! 예뻐요!” 예쁜 단독 주택에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고, 한 켠에는 할머니가 직접 몰고 다녔다는 예쁜 차도 주차되어 있다. 아이고, 이런 예쁜 집, 예쁜 차가 있는데 이걸 놔두고 굳이 바람의 언덕에 입소해서 사신다니.

“좋은 집, 좋은 차도 혼자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있는 것, 외로움 없고 안심할 수 있는 생활이 이런 집이나 차보다 훨씬 중요하지요.”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역시 쾌적하고 단정한 공간이 나왔다. 그러나 사람이 빠져나간 집의 한계는 분명히 보였다. 물론 이 마을에는 시바타 할머니처럼 멀쩡한 집을 두고 말동무, 벗을 찾아 바람의 언덕에 들어가 사는 분들이 꽤 있다. 어쩔 수 없이 빈집으로 쇠락해 갈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코코 자원봉사자들이 기본적인 청소와 관리를 도와준다고 한다. 집에 거주하는 노인의 경우 환기나 청소가 결코 쉽지 않은데, 그 역시 데이케어 담당자가 방문했을 때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집을 비우고 바람의 언덕에서 생활하든 빈집과 마찬가지인 자택에서 지내든, 코코의 헌신자들 덕분에 깨끗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말이다.

젊었을 때 손수 옷을 지어 입었다는 시바타 할머니 집에는 재봉틀, 마네킹 그리고 예쁜 옷이 많았다. 할머니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촬영팀에게 보여 주며 설명해 주었는데, 거침없고 또박또박한 말투에서 중증 치매 환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즐거운 집 구경을 하던 어느 순간, 시바타 할머니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녀의 눈 앞 벽에 CCTV용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할머니의 기분을 언짢게 한 것은 바로 그 카메라였다. 일반적으로 CCTV용 카메라는 천장처럼 화각을 넓게 잡을 수 있는 곳에 설치하는 게 상식인데, 시바타 할머니 집의 카메라는 벽면에서 공간 전체를 보도록 되어 있었다. 도쿄에 사는 아들이 치매에 걸린 엄마를 걱정해서 한 일이었다. 그것은 분명 아들의 효심과 염려의 결과물이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시바타 할머니는 굳이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아도 자신에게는 코코가 있고 코코테라스에서 웃고 떠들 수 있으며, 자신을 보호해 주는 바람의 언덕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것이다.

시바타 할머니의 거실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바람의 언덕으로 돌아가려던 때, 할머니가 수줍게 손을 잡아 끄셨다. 그러곤 자신이 지으신 양장 중에 예쁜 연보라색 블라우스를 꺼내시더니 내게 입으라고 주신다. 그러면서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말했다.

“쉿! 절대 다른 할매들한테는 내가 줬다고 말하면 안 돼.”

호호호! 우리 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이다. 할머니는 치매가 있지만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내 얼굴도 잘 기억하고 우리 비밀도 잊지 않으신 눈치였다. 그날 저녁에도, 그 다음 날에도, 내가 떠나는 날까지도 나를 만나면 다른 할매들 모르게 눈을 찡긋하셨고, 살짝 손을 흔들어 주시기도 했다. 웃음을 거두면 왠지 새침한 얼굴이 되는 시바타 할머니가 나한테만 웃어주시던 그 얼굴은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지 두어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뿐 아니라 누구나 치매를 두려워한다. 더 이상 끔찍한 병이 있을까 생각도 든다. 하지만 시바타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토록 고운 치매 증상이라면, 그리고 바람의 언덕 같은 공동체가 있다면 치매도 결코 무섭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웰에이징을 위한 세 번째 조건은 ‘웰에이징의 좋은 사례를 경험해 보기’ 아닐까? 치매 노인이 혼자 골목길을 걸어도 절대 안전한 그런 마을, 그런 공동체, 우리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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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 할머니가 젊은 시절 손수 만든 옷을 선물해주셨다. 집안 곳곳에 젊은 시절 좋았던 할머니의 솜씨가 남아있다, 화분만들기에 즐거운 할머니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아침부터 부산한 코코의 독수리 오형제 할배들. 작업복을 갖춰 입고 리어카를 끌고 삽을 하나씩 들고는 골목에 짠 등장하셨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암튼 할배들 표정이 득의양양, 자신만만했다. 내가 그동안 일상에서 마주친 남성 노인의 표정이란 대체로 무료하거나 잔뜩 화가 나 있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독수리 오형제의 표정에서는 ‘내가 해 줄게, 나만 믿어’,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겠지?’ 하는 자신감이 잔뜩 묻어 있다. 그 표정은 누군가의 남친, 남편 그리고 상남자의 얼굴이었다. 도대체 어딜 가시길래 저렇게!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독수리 오형제가 리어카를 끌고 밀어 도착한 곳에는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마중 나와 계시다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갑게 인사를 던졌다.

“아이고, 너무 잘 오셨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이 마을은 주택마다 예쁜 정원이 있다. 그런데 여성 노인 혼자 관리하기엔 쉽지 않아 보였다. 정원을 유지하려면 잡초를 자주 뽑아 주거나 잘라 줘야 하고, 나무가 자라면 전지 작업도 해야 한다. 여성 노인은 물론 일 재주가 없는 남성도 감당하기 쉽지 않다. 독수리 오형제에게 SOS를 보낸 할머니의 고민은 훌쩍 커 버린 감나무 가지가 옆집으로 자꾸 넘어가 민폐를 끼친다는 것.

독수리 오형제는 아무 걱정 말라며 리어카에 싣고 온 사다리를 감나무에 대고 올라가 담장을 넘어간 가지들을 잘라 낸다. 그냥 마구 잘라 내는 것도 아니다. 나뭇가지들의 균형을 맞춰 가며 다듬어 준다. 정원에 사는 모기들이 할배들 얼굴과 팔뚝을 물어뜯었지만, 독수리 오형제 할배들은 그때만 잠시 움찔할 뿐, 할머니가 부탁한 미션을 금세 끝내고 다시 자신에 찬 얼굴이 되어 할머니 앞에 섰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감나무에 달려 있는 감들을 따서 할배들에게 선물하고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신다.

엥? 돈을 받고 이 일을 했단 말야? 놀라움이 끝나기도 전에 그 금액이 한 사람당 500엔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다. 이건 뭐지?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코코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는 많은데, ‘500엔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SOS를 치고 싶어도 미안함, 부담감 때문에 선뜻 연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500엔 제도를 만들어 서로의 부담을 덜기로 했다는 것이다. 기준은 일인당 30분에 500엔. 주는 사람도 부담 없고, 받는 사람도 맘 편한 액수다. 이렇게 각자 500엔씩 번 할배들은 그 돈으로 코코의 운영비나 코코테라스 비품 구입비 등에 사용한다. 남는 돈은 할동비로 적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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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 파티가 이렇게 신나는 건 왜 때문일까요? 수요일 밤, 조용한 마을이 들썩들썩 파티 분위기가 된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이름하여 ‘나베회’가 열리는 밤이다. 글자 그대로 ‘나베 요리’ 즉 냄비 요리를 만들어 모임을 갖는 날인데, 특이한 것은 아재와 할배들 즉, 남성들만 요리를 한다는 점. 사실 요리랄 것도 없이 그저 물에다가 어묵과 양념을 풀어 끓이면 된다. 오늘의 나베회는 특별한 부제가 붙었다. 우리 촬영팀을 마을에서 대접하는, 그리하여 ‘한일 문화 교류를 위한 우정의 밤’이다. 물론 평소처럼 마을 사람 누구나 파티장에 와서 먹고 마시고 수다 떨다 돌아가는 자리다. 하지만 말로만 한일 문화 교류가 아니었다. 그들이 차려 준 나베를 덥석 먹기만 한다면 그게 무슨 교류! 해서, 한국에서 온 게스트이자, 한의사이자, 가정주부인 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오늘 모이는 스무 분께 내가 만든 잡채를 대접하기로 했다. 잔치 음식, 명절 음식의 대명사이자 갖가지 재료가 어우러진 음식이니, 역시 갖은양념이 들어가는 나베와 마찬가지로 ‘함께 섞여 사는 공동체 문화 교류’에 딱 맞는 음식 아닐까? 마트에 가서 중국식 당면을 구하고 매운 일본 양파를 써느라 눈물을 뚝뚝 흘려 댔지만 어쨌든 ‘박미경표 잡채’는 그 요리 과정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할머니들이 준비하고 무치는 과정을 호기심 있게 지켜보셨고, 한 할머니는 ‘아~’ 입을 벌리며 간을 보시겠다고 했다. 모두 하하호호 웃으며 음식 준비를 했는데, 이렇게 함께 즐기다 보니 내가 이곳에 촬영을 온 건지 가족을 만나러 온 건지 당최 헛갈릴 정도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이윽고 잡채가 완성되자 모두들 한두 젓가락씩 먹고는 엄지 척! 내 마음을 뿌듯하게 해 주었다.

공연도 열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평소 취미로 연습하던 악기를 갖고 나와 합주를 하는 것. 소소한 취미라는 말에 ‘서툰 실력’을 예상했는데 막상 연주가 시작되자 프로 연주자 못지않은 솜씨로 감동을 안겨 주었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위한다며 ‘아리랑’을 특별히 연주해 주실 땐 괜히 뭉클해지기도 했다. 연주의 마지막 곡은 ‘케세라세라’. 잔뜩 흥이 오른 모두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연주 대신 가사를 랩처럼 읊조리는 할머니 덕에 모두 깔깔깔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그래, 케세라세라! 무엇이든 괜찮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쭈그렁 노인으로 늙으면 어때! 뭐가 되어도 괜찮아! 바람의 언덕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함께 연습하고 합주도 하며 실력을 연마했다고 한다. 악기 연습 자체도 즐겁지만 끝나고 나서 함께 나누는 이야기, 식사, 한 잔의 술이 최고라고 한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웃고 즐기면서도 마음 한 켠에 허전함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한국에서 노인들과 이렇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적이 있던가? 암만 생각해도 그런 경험은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제 한국의 노인들도 예전처럼 모이면 술 마시고 화투만 치는 게 놀이의 전부는 아닐 텐데, 나 역시 편견에 사로잡혀 살아 온 것은 아닌지, 반성도 했다. 우리도 이렇게 함께 모여 공연 준비도 하고 요리도 하며 공동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텐데, 하는 바람과 아쉬움 말이다.

나베회 또한 ‘500엔의 공식’으로 운영되었다. 먹고 마시고 즐긴 사람은 누구나 500엔을 내놓고 돌아갔고, 그 돈은 역시 코코 운영비로 쓰이게 된다. 나베회가 끝날 무렵 웰에이징의 네 번째 조건이 떠올랐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사람을 갈라 치기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이든, 성이든, 지역이든, 학벌이든, 무엇이든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동등하게 대하고 존중하는 것. 그런 문화가 품격 있는 웰에이징을 가능케 할 것이다. 바람의 언덕 노인들이 나와 우리 촬영팀에게 예의를 다해 대해 준 것처럼, 우리 또한 그들을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로 과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예의를 갖추되 편안하고 쉽게 대화와 농담을 나눴고 우리는 그렇게 단박에 친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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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베회의 하이라이트 음악연주시간에 하모니카를 불던 멋진 할머니. 모두 모여 합주 연습을 하고 뒷풀이를 가지는 시간이 제일 즐겁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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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마을의 빈집을 꾸미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빈집은 아름다운 카페처럼 되어 이 마당에 마을의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모여들게 될 것이다, 육아 상담
▶젊은 피, 새로운 사람들이 마을을 살린다

마을에 노인만 남는다면 그 세대가 지나고 마을은 끝이 난다. 아무리 좋은 유무형의 유산을 쌓으면 무엇 하겠나. 그것의 미래가 없다면, 연속성이 없다면 사라지는 건 시간 문제다. 우리나라의 시골 마을도 대부분 그렇다. 지금은 마을회관이 시끌벅적해도 이 노인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마을은 텅 비게 된다. 웰에이징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바로 ‘젊은 피 수혈’이다. 노인 혼자서 아무리 잘 늙어가겠다고 노력을 해도 거기서 끝이라면 소용이 없다.

노인은 ‘꼰대’가 아니다. 노인은 ‘인생 선배’다. 바람의 언덕에서 간혹 젊은 마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얘기가 있다. 마을의 노인과 어울리고 함께하면 배우는 것이 많다고. 그들은 인생 선배기 때문에 모든 질문에 답을 알고 있다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기꺼이 노인들의 생활에 동참하며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돕는 것이다. ‘노인 공경’이라는 가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마을의 젊은이들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도 언젠가 나이가 들어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내가 지금 속한 마을과 공동체를 더 좋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코코테라스에는 ‘응애응애’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침 일찍부터 마을에서 젊은 엄마들이 젖먹이 아이들을 하나씩 데리고 코코테라스로 모여든다. ‘육아 상담’이 있는 날이다. 마을 할머니 중에는 간호사, 조산원 등 육아 관련 경력을 갖고 계신 분이 꽤 있다. 육아 상담 일에는 그분들이 봉사 활동을 나와 젊은 엄마들의 육아 고민을 상담해 준다. 비슷한 또래의 엄마들이 모였으니 상담에서만 끝나지 않고 자신의 육아 경험담을 나누며 유익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 상담을 위해 왔든 그저 친구를 보기 위해 왔든, 코코테라스에 있는 노인들은 아기들이 시끄럽게 울고 보채는 소리를 즐기는 것 같았다. 아기들을 보면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또한 노인이 많은 지역 사회에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큰 활력이 되는지 모른다고 이야기 한다.

젖먹이뿐 아니라 늠름한 젊은 대학생 청년들도 바람의 언덕에 출현, 새로운 활기를 더해 주고 있다. 이 마을에 대학생들이 찾아오게 된 것은 ‘빈집 가꾸기’ 사업이 계기가 되었다. 노인 증가와 젊은이들의 이탈 현상으로 이 마을 역시 빈집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 빈집을 방치하면 탈선 장소가 되거나 마을의 흉물이 된다. 그런데 반대로 빈집을 마을의 소통 공간으로 재생하면 어떨까? 마을 사람들이 들러 차도 마시고 이야기하는 공간으로 바뀐다면? 이런 생각이 모이면서 빈집 가꾸기 사업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작업을 할 것인가였다. 이에 바람의 언덕 이사장님과 독수리 오형제 등 언덕 위 노인들은 ‘주변 대학 교수의 도움받자’고 결의, 전문가인 교수와 학생들이 마을에 새 바람을 일으켜 준 것이다. 교수와 학생들은 그저 작업이나 하고 돌아가는 게 아니다. 노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하고, 작업 현장에서 빈집의 스토리를 나누면서 실질적인 교감의 시간을 갖는다. 이렇듯 젊은 세대가 마을에 유입되고 함께 노인을 위한 배려에 동참하며 바람의 언덕은 세대와 세대가 어우러지는 이상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람의 언덕에서 세대의 조합을 목격하며 웰에이징은 결코 노인들만의 노력으로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런 변화와 노력 덕분일까? 바람의 언덕은 주변 도시는 물론 도쿄도 전체, 심지어 한국에까지 소문이 났고(그래서 촬영도 오게 된 것이다), 이 마을에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유입이 늘고 있다.

사진설명
▶사실은 우리나라가 더 좋았어요 일본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느끼면서 당시는 “와, 참 좋다. 부럽다. 배우고 싶다”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떠올려보면 십수 년 전에는 그보다 좋은 우리나라의 ‘웰에이징’, ‘에이징 인 플레이스’ 사례가 많았다는 사실이 생각난다.

지금은 도시화가 더 진행되고 다들 바빠서 퇴색되었지만, 우리나라의 도시와 아파트에는 웰에이징이 가능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바로 ‘노인정’과 ‘반상회’다. 반상회는 매달 열려서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고 부모님은 뭘 하시고 건강은 어떤지 모든 걸 알 수가 있었고, 독거 노인이라도 계시면 어머니들이 모여서 반찬을 갖다 주고 건강과 안부를 체크하는 등의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노인들이 노인정에 잘 모이지 않지만 그때는 노인들 모임이 마치 주부들 모임처럼 활성화되어 있어서 노인들이 아파트의 터줏대감 역할을 하면서 아파트에 도움을 많이 주었던 것이 생각난다.

지방은 말할 것도 없다. 마을회관이라는 곳이 있어 모임의 공간이 되었고, 누구네 집에 잔치가 있으면 마을 어르신이 주도가 되어 젊은 사람들이 품앗이를 하면서 잔치, 김장 등 큰 행사를 함께 치르곤 했었다. 지금도 이러한 풍습이 남아 있는 곳이 있지만 삶이 바빠지고 아파트에서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사회가 되면서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이처럼 좋은 씨앗 제도와 문화를 더 늦기 전에 되살리면 좋지 않을까. 중고생들의 봉사 점수도 쓸데없는 봉사로 채울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속한 공동체의 노인을 돕기 위한, 또 본인과 본인의 부모님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연속성 있는 공동체의 모델’로 키우기 위한 노력으로 연결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한의사로서 드는 생각은 역시 웰에이징을 위해서는 ‘관계를 위한 연금’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티에이징을 위해서는 ‘근육 연금’을 든다. 근육량을 늘려야 병적인 노화를 늦출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내가 본 노년층의 고민은 바로 ‘외로움’과 ‘불안감’이었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나 배우자와의 끈끈한 관계 성립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공동체, 마을, 동료 등과의 관계 연금 역시 중요하다. 오래 건강하게 살면 뭐하나. 그 하루하루가 외롭고 불안하다면 하루빨리 죽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즐겁고 편안하게,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면, 노년이 막연히 불안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내가 행복하고,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은 나의 몸을 젊고 건강하게 만드는 데도 분명히 중요한 요소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되고 또 반대로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준비. 지금부터 하는 것이 관계의 연금 들기, 웰에이징에 대한 대비가 아닐까 싶다.

[글 박미경(한의사, 오라한의원 원장) 사진 박미경, 안동수 다큐PD(미디어초이스), 픽사베이 일러스트 포토파크]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54호 (18.11.2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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