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 ‘미지근한 사이다’라고?

김태훈 기자

하나의 청원에 112만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시작된 지 1년을 넘긴 11월 1일 현재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청원은 10월 14일 일어난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과 관련된 청원이다. 해당 사건에 대해 국민들이 분노하는 여론이 반영되면서 11월 16일까지인 청원 만료일이 되기 전임에도 청와대 답변 요건인 20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구체적인 내용은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만 청와대가 처음으로 공식 답변한 소년법의 형사 처벌대상 적용 연령을 낮춰달라는 청원과도 맥락이 통한다. 분노한 여론이 ‘엄벌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다.

2017년 9월 25일 공개된 청와대 국민청원 1호 답변 영상에서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의 진행으로  조국 민정수석과 김수현 사회수석이 대담하고 있다.  / 청와대 유튜브

2017년 9월 25일 공개된 청와대 국민청원 1호 답변 영상에서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의 진행으로 조국 민정수석과 김수현 사회수석이 대담하고 있다. / 청와대 유튜브

조국 수석 답변은 ‘미지근한 사이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일 자체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최초의 공식 답변에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청원인들에게 ‘사이다’를 건네지 않았다. “형벌을 아주 강화한다고 범죄가 주느냐? 그렇진 않습니다. 범죄 예방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엄벌주의는 범죄가 일어난 뒤에 그 사람에게 중형을 내리자는 것입니다.” 조 수석의 답변은 ‘미지근한 사이다’라는 반응을 불렀다.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째인 지난해 8월 17일 문을 연 청와대 국민청원 창구를 통해 접수된 청원 중 답변 요건인 20만명 이상의 참여인 수를 충족한 청원에 대한 첫 답변이었다.

청원 내용은 소년법에서 만 14세 미만이면 형사처벌을 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는 연령 기준을 낮춰 죄질이 나쁜 청소년들에게도 엄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원인들이 요구한 ‘엄벌’ 요구 대신 청와대가 내놓은 답은 ‘예방과 재활 강화’였다. 그해 9월 25일 공개된 답변 영상에서 대담을 진행한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 “아마 청원하신 국민들께서 이 대담을 보시더라도 굉장히 답답해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청와대는 청원 내용을 즉각 수용하는 대신 문제를 근본적으로 차근차근 해결하겠다는 정공법을 택한 셈이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범법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청원이 단골로 올라오는 현상에서 국민 정서의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읽어내는 전문가들도 있다. 현재까지 한 달 동안 청원 참여인이 20만명을 넘겨 청와대가 답변한 53개 청원 주제 가운데 처벌 강화 내용이 담긴 주제는 15개에 달한다.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른 경우 감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청원을 비롯해 미성년자 성폭행 형량을 높여달라는 청원, ‘리벤지포르노’에 대한 강한 처벌 요구 등 분야는 다르지만 이들 주제를 관통하는 정서는 비슷하다. 범죄로부터 안전한 생활환경을 만들고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엄정한 법 집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벌과 안전, 청와대 청원에서 발견되는 이 두 키워드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정서는 무엇일까. 지주형 경남대 교수(사회학)는 ‘공감’과 ‘분노’가 하나로 묶여 있다고 설명했다. 잔혹한 범죄나 시민들의 상식선에서는 불합리해 보이는 솜방망이 처벌 소식을 접할 때 바로 분노가 치미는 것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지만 피해자가 처한 현실에 공감하는 감정이 더해져 여론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지 교수는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해자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상황이 알려지면서 비슷한 청년층 문제를 겪고 있는 청년들을 포함해 현실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이 더욱 공감하게 됐다”면서 “언론의 보도에 더해 청와대 청원이나 SNS 등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통로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감정이나 정서가 더 쉽게 확산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청원의 두 가지 키워드, 엄벌과 안전

시민들이 공정하면서도 엄격한 처벌을 요구하는 데는 범죄 때문에 입은 피해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직접 공정한 사회를 요구하는 주체로 나서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동귀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예전 같으면 피해를 입어도 여건이 안 되면 체념하고 말았던 보통의 시민들도 공정한 사회를 요구하는 일종의 시대정신에 공감해 분노나 불안이 촉발한 참여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눈에 띄는 변화”라며 “일종의 군중심리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어느 때나 이런 쏠림 현상에는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있기 때문에 자정을 위한 대책 또한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기본적으로 청원인의 신상이 익명으로 보장된다. 때문에 특정 정치세력이나 운동단체들이 조직적으로 청원 답변을 위해 구성원들을 동원할 여지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까지 답변이 완료된 청원들의 경우 일반 시민들의 생활과 연관된 주제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특정한 이익이나 목적에 따라 20만명 이상을 동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또 이러한 익명성은 한편으로는 시민들이 주저없이 쉽게 관심있는 청원에 참여할 계기가 되기도 한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직장인 서모씨(35)는 청원에 동의한 주제 중 2007년 울산 어린이집 원장 부부의 원아 학대 사망사건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서씨가 참여했다고 기억하는 4~5건의 청원 중 유일하게 청와대의 답변이 나온 청원이기도 했지만, 자녀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내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서씨는 “청원을 올린 분도 썼듯이 나도 이미 오래된 사건이라 재수사나 추가로 처벌하는 일이 가능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동학대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청와대 청원으로라도 이 문제를 조금 더 제대로 다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화면.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화면.

시민들의 에너지 표출 통로 역할

해당 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엄규숙 청와대 여성가족비서관은 아동학대 사건에 대한 처벌과 규제 기준은 이후 강화되어 왔다고 밝혔다. 법원에서 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하는 추세도 나타나고 있고, 처벌 후 어린이집 취업제한 등의 조치도 더욱 엄격해졌다는 등의 경과사항에 대해서도 알렸다. 서씨는 “청원에 올라간 울산 어린이집 사건 이후로 변화가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그보다 정부가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긴 듣고 답변을 하는구나 싶어 약간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면서 “마지막에 답변자가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입니다’라는 말로 끝맺은 것이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한 것 같아 좋았다”고 말했다.

청와대 청원 답변이 일각의 비판처럼 ‘미지근한 사이다’인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당장 청와대가 청원 내용을 모두 받아들여 전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않았더라도 서씨와 같은 청원 참여자들로서는 다소간 만족할 만한 행정서비스 경험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청원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정치 효능감’이 높아진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한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대표적으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같은 사안에서 나타난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사표현과 변화의 동력이 청와대 청원으로 여론이 모이는 현상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청원한 내용을 청와대나 정부기관이 반드시 그대로 이행해야만 한다는 강박 대신 일단 최고 권력기관이 그동안 잘 모이지 않던 시민들의 자발적인 목소리를 듣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치 효능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청와대 청원이 가능해져서 시민들의 참여와 의사표현이 늘었다기보다는 이미 사회적 문제에 직접 나서려 하는 시민들의 에너지가 축적되면서 청와대 청원이 그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엄벌주의나 처벌 강화와 같은 목소리를 포함해 사회 전반의 공정성과 안전을 보장하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거리낌없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상 역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것이 전 교수의 분석이다. 전 교수는 “청와대 청원은 다른 권력기관들과 전문가 중심의 정책 수립 및 입법과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신하는 시민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또 그것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의의가 있다”며 “다만 청와대에만 집중되는 의사표현이 앞으로 제도권이나 시민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고르게 나와 더 효과적인 변화를 만드는 것은 시민과 정부 모두의 과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청와대 청원을 통해 표출되는 시민들의 요구는 처음 눈길을 끌었던 초기에 비해서도 줄지 않고 점차 늘어나고 있다. 청와대 청원이 시작된 지난해 8월부터 정권 출범 1주년을 맞은 올해 4월 중순까지 약 8개월 동안 접수된 청원건수가 16만건에 달했지만 이후 6개월여의 기간 동안 접수된 청원건수도 16만건으로 기간 대비 건수는 늘어나는 추세다. 11월 1일 현재 32만여건의 청원 수를 바탕으로 단순 계산하면 하루 평균 744건, 20만명 이상 청원 요건을 충족하는 청원은 월 평균 7~8건 정도로 나오고 있다.

비슷한 기간 동안 청와대 국민청원 이전까지는 대표적인 정부 민원창구였던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 접수 건수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청와대 청원이 시작된 지난해 8월 권익위에 접수된 총 민원건수는 35만여건으로, 민원접수량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명절기간이 낀 지난해 10월 23만여건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늘어 올해 추석이 끼었던 9월에도 44만여건까지 늘어나는 등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국회에서도 시행 중인 입법청원제도는 현저히 적은 청원건수를 기록하고 있다. 20대 국회가 개원한 2016년 6월 이후 2년 4개월 동안 접수된 전체 청원건수가 160건, 이 가운데 처리된 건수는 18건에 불과해 142건은 계류 중인 상태다.

국민신문고 접수 건수도 점차 증가

국회 입법청원이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어버린 데는 무엇보다 국회 청원심사규칙에서 국회의원의 소개가 있어야 입법청원이 가능하다고 명시한 이유가 크다. 보통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아무리 많은 서명을 받았더라도 국회의원 소개 없이는 청원을 제출할 수 없기 때문에 국회의원과의 접점이 없으면 요구사항을 국회 입법활동에 반영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때문에 입법청원을 낸 주체를 살펴보면 대부분 시민사회단체에서 국회의원과의 협조를 통해 제출한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슈가 생길 때마다 관련 청원이 즉각 올라오고 참여자들의 수도 빠르게 늘어나는 청와대 청원의 특성을 고려하면 빠른 대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정서를 반영하지 못한 입법청원은 계속해서 외면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청와대라는 창구만이 시민들의 여론을 반영하는 쪽으로 인식되거나 다른 행정·입법기관에 대한 불신이나 무관심은 방치하게 되는 상황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최근 시민들의 사회의식을 조사해 보면 범죄에 대한 불관용 원칙이 예전보다 크게 나타나고 있고, 강서구 PC방 사건의 경우 젊은 청년이 무방비 상태로 잔혹하게 당한 점 때문에 청와대 청원 등을 통해 여론을 모으는 상호작용이 일어난 것”이라면서 “실질적으로 해당 문제를 잘 다룰 수 있는 기관이나 부처가 있음에도 청와대 청원이 가장 쉽고 효율적으로 문제제기할 수 있는 통로로 비쳐지면서 다른 정부기관에 대해 불신이 생길 수 있는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과 정서가 청와대 청원으로 표출되면서 나타나는 장점과 단점의 양면은 청와대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온라인 소통 책임자인 정혜승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은 “분노의 목소리가 많이 담긴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것 또한 민심의 표현이기 때문에 이런 정서를 잘 담아내면서도 제도 개선과 사회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제도를 개선하는 역할은 대의기구인 국회의 몫이기도 하기 때문에 청와대 국민청원은 국민들의 여론을 모으는 공론장 가운데 하나로 역할을 다하면서 여건이 되어 국회와 협업할 기회가 생긴다면 함께 국민의 요구를 수렴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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