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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매경데스크] 편의점 상비약 하나 못 늘리는 나라

박봉권 기자
입력 : 
2019-11-25 00:08:01
수정 : 
2019-11-25 17: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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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만난 40대 바이오업체 대표는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피 터지게 노력해 뭐 하나 만들어 출시하려는데 뜬금없는 자료를 요구하며 시간만 질질 끄는 행태를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의 분노를 빌미 삼아 소비자 파급력이 큰 의료계 이슈 몇 가지를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놀랍게도 정말로 어느 것 하나 시원스레 해결된 게 없었다. 정부가 의료산업 규제를 푼다며 가장 먼저 생색을 낸 게 혈액 등으로 감염·질병 여부나 예후를 진단하는 체외진단 의료기기다. 지난해 7월 분당서울대병원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체외진단기기는 식약처 허가만 받으면 곧장 출시할 수 있도록 절차를 대폭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이러면 390일 걸리던 허가기간이 80일로 확 준다. 기업들이 반신반의했는데 역시나 나중에 '후평가'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렇더라도 140일 정도로 단축된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 뚜껑을 열고 보니 후평가를 위한 복잡한 문헌 제출 요구 등 여전히 내야 할 자료는 산더미여서 거의 임상시험을 다시 한번 하는 수준이라는 현실에 업계는 좌절했다. 선진입·후평가 체외진단기기 시범사업 참여를 신청한 기업이 단 한 곳에 그친 이유다. 또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안전상비약 가짓수 좀 늘려보자는데 이게 안 된다. 정부가 지난해 8월까지 2년간 6차례 품목확대회의를 열었지만 결론을 못 냈다. 올 들어선 아예 단 한 차례도 회의를 열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은 7년째 편의점에서 해열진통제·감기약·소화제·파스만 살 수 있다. 도대체 국민들은 이해가 안 된다. 약국이 문을 닫는 심야시간대나 명절 연휴·공휴일에 편의점서 이들 4가지 약품 외에 위장약, 지사제 등 다른 약도 구입하고 싶은데 그걸 안 풀어주니 말이다. 미국·일본은 물론 중국 소매점에선 수천 가지 종류의 다양한 약을 손쉽게 살 수 있다.

내 몸에 특정암 등 질병유전자가 있는지, 탈모·고혈압 등에 취약한 유전자는 없는지 검사하는 유전체분석서비스는 성장잠재력이 큰 뉴비즈니스다. 그런데 국내 DTC(소비자 직접 의뢰 유전체검사)업체들은 3년째 손발이 묶여있다. 소비자들의 관심이 큰 질병 유전체검사는 아예 불법이고 그나마 가능한 비질병검사는 혈압·탈모 등 12개로 제한해놨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360여 개 DTC를 허용하고 있고 미국 등 해외 업체를 통하면 암·알츠하이머·뇌경색·골다공증 등 온갖 질병 유전체검사를 받을 수 있다. 역차별 불만이 커지자 정부가 꺼내든 게 서비스항목을 57개로 찔끔 확대하는 시범사업인데 업체들은 썩 내켜하지 않는다.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할 만한 수준이 아닌 데다 시범사업 자체가 당장 항목 확대를 안 해주겠다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 일로에 있는 원격의료도 19년째 시범사업 중으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투자 개방형 병원 설립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부도 국민 편익·후생 차원에서 편의점 상비약·DTC서비스·원격의료 확대와 네거티브 규제시스템으로의 전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도 강단 있게 추진하지 못하는 건 약물 오남용·환자 안전 등을 전가의 보도처럼 흔들며 무조건 반대만 하는 약사·의사 등 힘센 기득권 세력의 눈치를 과도할 정도로 보기 때문이다. 선진국은 물론 중국도 하는 걸 우리가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기득권 세력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 억지일 뿐이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이해의 조율이다. 특히 이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일수록 정부가 중심을 잡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강력한 조율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꼭 필요한 일인데도 괜히 건드렸다가 골치만 아파질 것을 우려해 좌고우면하거나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는 건 직무유기이자 무책임의 극치다. 기득권 지대추구를 최우선적으로 혁파할 적폐로 규정했던 정부 아닌가. 책임은 내가 진다는 결기로 이제 결과물을 내놔야 한다.

[박봉권 과학기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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