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수수한 정경에 마음 빼앗겨, 한없이 걷고 싶은 이 길

김진 | 여행작가

미국 보스턴의 가을

보스턴의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많지만, 아무래도 적갈색 벽돌 건물과 찰스 강변이 어우러지는 풍경 때문일 것이다. 아파트 브랜드로 알려진 ‘브라운 스톤’은 보스턴의 애칭이다.

보스턴의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많지만, 아무래도 적갈색 벽돌 건물과 찰스 강변이 어우러지는 풍경 때문일 것이다. 아파트 브랜드로 알려진 ‘브라운 스톤’은 보스턴의 애칭이다.

미 건국 역사 숨어있는 유적 16곳
둘러볼 수 있는 ‘프리덤 트레일’
시장·항구 등 구경거리 넘쳐나

한국·중국의 교육열에 힘입어
하버드·MIT 캠퍼스 투어 인기
존 하버드 동상 앞은 늘 붐벼

찰스 강변 매일 달렸다는 하루키
보스턴의 매력을 ‘정경’이라 표현
극적인 아름다움 없이도 매력적

미국 동부에서 뉴욕이 아닌 딱 한 군데를 고르라면 단연코 보스턴이었다. 최근 보스턴 직항노선이 취항하면서 궁금증이 커졌고, 보스턴 학살이나 보스턴 차 사건 같은 것을 세계사 교과서로 배웠던 까닭에 학습 의욕까지 증폭됐다. 미국 역사가 실질적으로 시작된 곳이어서 만약 미국 여행 순서를 정한다면 보스턴, 뉴욕, 워싱턴 등으로 이어지는 동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선이 자연스럽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리고 골드러시의 역사가 밴 중부를 거쳐 서부의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동선을 꿈꿔왔지만, 현실은 꼭 그렇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일정 속에서도 보스턴만큼은 큰 비중으로 남겨 두었다.

■ 보스턴을 이해하는 열쇠

보스턴 차 사건을 기획했던 장소인 올드사우스 집회소.

보스턴 차 사건을 기획했던 장소인 올드사우스 집회소.

보스턴을 여행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을 걷는 것은 여행의 첫 번째 과제이자 보스턴을 가장 잘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오전 9시30분에 시작하는 투어를 기다리는 동안 보스턴 코먼(Boston Common)이라는 커다란 공원을 산책했다. 독립운동 시절 군사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인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18세기 유럽풍 건축물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영국의 어느 소도시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느긋하게 산책을 하거나 개와 공놀이를 하는 평범한 보스토니언(Bostonian)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 속에서 유독 어수선해 보이는 사람들은 프리덤 트레일을 걷기 위해 모여든 여행자들이다.

프리덤 트레일은 건국의 역사가 숨어 있는 유적지 16곳을 모두 둘러보게 만든 4㎞의 길이다. 도로 중심부에 붉은 선을 그려놓거나 붉은 벽돌을 박아놓아서 구글맵이나 가이드 없이도 누구나 쉽게 따라 걸을 수 있게 해두었다. 역사 투어라고 해서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유적지 사이마다 시장, 쇼핑센터, 요트 항구처럼 구경할 곳이 끊임없이 나타나 걷는 동안 눈은 즐겁고 배고플 틈도 없다.

1824년에 지어진 퀸시 마켓은 단정한 신전처럼 생겼다. 맛있는 식당들로도 유명하지만 수준 높은 버스킹 때문에 입구는 늘 북새통을 이룬다.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면 통로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시장은 백화점처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데다 음식은 미국 물가에 비해 고마울 정도로 싼 편이며, 당일 들어오는 해산물로 만든 신선한 메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어서 즐겨 찾았다.

■ 400년 역사 압축한 반나절 걷기

보스턴에 흔한 수백년 된 레스토랑.

보스턴에 흔한 수백년 된 레스토랑.

올드 노스 교회로 가는 길엔 이탈리아 타운이 나온다. 상점 간판이 온통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고 이탈리아 정통 레스토랑과 카페, 시가바까지 있어서 도무지 미국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셨다. 여기서는 “생큐(Thank you)”보다는 “그라치에(Grazie)!”가 어울린다.

낡은 커피 기계, 모서리가 닳은 테이블과 삐걱거리는 의자. 200년도 넘은 오래된 공간에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과장된 말투와 제스처가 오갔다. 보스턴 올드타운에서 18~19세기부터 영업해 온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국, 아일랜드, 독일 등 이민자들이 낸 수백년 된 상점은 골목마다 보석처럼 박혀 있다.

1775년 독립전쟁의 시작이 된 벙커힐 전투를 기념한 벙커힐 기념비

1775년 독립전쟁의 시작이 된 벙커힐 전투를 기념한 벙커힐 기념비

1620년 박해를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들이 정착하게 되면서 보스턴의 역사는 시작됐다. 그 시작부터 독립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여행자들은 프리덤 트레일로 쉽게 훑어보게 된다. 보스턴 코먼을 지나 식민지 행정부로 쓰였던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 독립전쟁의 기폭제가 된 보스턴 학살(1770년)이 발생한 현장인 패뉴얼 홀, 독립선언서 서명인인 존 행콕과 새뮤얼 애덤스가 잠들어 있는 그래너리 공동묘지 등 독립 역사의 궤적을 따라가면 독립전쟁 당시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던 찰스타운의 벙커힐(Bunker Hill) 기념비에 닿게 된다. 이 벙커힐 전투가 바로 1775년 독립전쟁의 시작이다.

프리덤 트레일은 1951년부터 시작됐다. 여기저기 흩어진 유적지를 사람들이 보기 편하도록 언론인 윌리엄 스코필드가 구상해 만든 보행도로다. 바닥의 표식과 빨간 선만 따라 걸으면 반나절 안에 미국 독립의 역사를 숨가쁘게 마스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서울 경복궁과 광화문, 종로 일대를 잇는 서울 트레일을 상상해봤다.

■ 닳고 닳은 동상의 발

학구열 높은 아시아 관광객들이 꼭 들러 발을 만지고 가는 하버드 동상.

학구열 높은 아시아 관광객들이 꼭 들러 발을 만지고 가는 하버드 동상.

사실 프리덤 트레일을 완주하는 한국인 여행자는 아직 많지 않다. 보스턴 여행이라 하면 뉴욕에 온 김에 당일치기로 들러보거나(무려 왕복 8시간이 넘는데도), 교육열에 힘입어 하버드대학이나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캠퍼스 투어를 목표로 여행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명문 대학은 정확하게 말하면 보스턴이 아니라 케임브리지에 있다. 매사추세츠주의 주도인 보스턴은 서울의 3분의 1 정도 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시다. 케임브리지와 브룩라인, 뉴턴 등 작은 도시들이 보스턴에 붙어 있는데 이를 통틀어 보스턴이라고 한다. 하지만 전통을 중시하고 보수적인 성향인 보스턴과 대학이 많아 자유로운 성향의 케임브리지는 너무나 다르므로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정확하다. MIT를 다니는 지인도 자신의 학교가 보스턴이 아닌 케임브리지에 있다는 사실을 현지에 와서야 알았다고 했다.

보스턴은 미국의 아테네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국을 떠나 신대륙을 찾아온 청교도들이 기독교정신으로 무장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엘리트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1636년 설립된 하버드대학은 이렇게 탄생했다.

보스턴 직항편이 취항하게 된 데에는 우리나라의 뜨거운 교육열이 한몫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버드대와 MIT엔 한국인이나 중국인 고등학생이 그룹으로 몰려다니거나 가족 단위로 다니는 모습이 많았다. 유독 두 나라만큼은 프리덤 트레일보다 이 캠퍼스 투어를 열렬히 사랑한다. 하버드대 캠퍼스 안에서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곳은 존 하버드 동상이다. 동상의 발을 만지면 후손이 하버드대에 입학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어서 동상 앞엔 언제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교육열이 높은 한국인과 중국인이 거의 대부분이다. 닳고 닳아서 황금색으로 번쩍거리는 하버드의 발을 만지고 나서는 하버드 로고가 박힌 맨투맨 티셔츠와 모자를 사가는 것이 거의 획일화된 여행 코스인 듯했다. 보스턴은 여행자에게 야구팀 로고가 박힌 티셔츠가 대학 티셔츠에 밀려 인기를 끌지 못하는 드문 도시다.

MIT 친구에게 하버드 로고티를 입고 MIT에 들어가도 괜찮은지 물었더니, 전혀 상관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버드와 MIT는 인문학과 공학으로 각각 다른 분야에 강점이 있어서 고려대와 연세대 같은 경쟁관계가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세계적인 공대답게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로 특유의 실험정신이 드러나는 스타타(Stata)센터 같은 독특한 캠퍼스 건축을 둘러보는 것도 좋았지만 내 맘을 이끈 것은 캠퍼스와 나란히 있는 찰스 강변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매일 뛰었다던 산책길이 MIT를 따라 이어졌다.

■ 찰스 강변의 정경

“지금까지 정경이 가장 인상 깊은 장소를 꼽는다면 뭐니 뭐니 해도 찰스강의 강변길이다. 나는 사정만 허락하면 매일같이 러닝화를 신고 이 길을 달렸다.”(무라카미 하루키, <찰스 강변의 오솔길> 중에서)

보스턴과 케임브리지를 가로지르는 찰스 강변을 2년 동안 뛰었다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작가가 성실하게 달릴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얼마나 아름답길래, 얼마나 글쓰기에 영감을 주길래. 1897년 시작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마라톤 대회인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여섯 번이나 출전한 하루키는 보스턴의 매력을 한마디로 ‘정경’이라고 했다.

보스턴 마라톤은 홉킨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찰스 강변을 달려 보스턴 다운타운의 마천루 앞에서 끝을 맺는다. 극적인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장악해버리는 강은 이 세상에 많다. 거기에 비해 찰스강은 수수하다. 그래도 이따금씩 산책을 하며 느낀 건 찰스 강변에서는 한없이 걷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을 따라 뛰는 마라톤이 유명해졌나 싶다.

윤슬이 눈부신 강변을 따라 정박된 하얀 요트, 그 뒤로 빼곡하게 이어진 적갈색 사암 벽돌의 마을에선 고전미가 느껴졌다. 적갈색 사암을 뜻하는 ‘브라운 스톤’은 보스턴을 묘사하는 단어이면서 17세기부터 지어진 미국 동부 상류층의 주거 양식을 말한다. 강변길을 걷다가 담장이 없는 MIT가 나타날 때면 찰스 강가를 캠퍼스로 쓰는 학생들이 부러워 잔디에 벌렁 누워보기도 했다.

녹음이 황금빛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는 늦가을. 도토리가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톡톡 소리가 났고 다람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긴 미국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보스턴을 대표하는 해산물 레스토랑인 리걸 시푸드에서 바다향 가득한 랍스터 샌드위치와 따뜻한 클램 차우더 수프를 주문했다. 그리고 보스턴에서는 습관이자 일상이 되어버린 새뮤얼 애덤스 맥주를 한 병 비웠다.

▶필자 김진

[김진의 나 혼자 간다](17)수수한 정경에 마음 빼앗겨, 한없이 걷고 싶은 이 길

기업 홍보팀에서 십여년 근무하다가 여행을 좋아해 여행작가가 되었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안 좋다고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두루 누릴 수 있어서 여전히 행복하다. 여행과 글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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