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공감
어느 집이나 그렇듯 어릴 적 내 방에도 세계명작전집이 있었다. 이럴 때 무슨 출판사의 어떤 시리즈라고 정확히 이야기하면 좀 그럴듯해 보이던데, 안타깝게도 기억나지 않는다. <흰 고래 모비딕>이나 <몽테크리스토 백작> <톰소여의 모험> 같은 책들이었는데 심심할 때마다 그중 한 권을 골라 읽곤 했다. TV에서 만화영화를 하지 않는 시간이나 밖에 친구들이 모여 있지 않을 때 갖고 노는 놀잇감이었다. 그리고 그중 한 책에서, 만화영화가 주던 재미와는 다른 종류의 감정을 처음 느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었다.
10대 초반의 시골 소녀에게 이 책은 충격이었다. 이토록 내내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는 읽어본 적이 없었다. 여자 노예가 어린 아들이 팔려갈 위기에 처하자 함께 도망치는 장면은 극도의 공포였고, 목화밭의 학대 장면은 끔찍했으며, 결국 톰 아저씨가 죽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자 슬픔과 허탈함이 밀려왔다.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에 시달리는 느낌이랄까.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읽은 첫 책이다. 내 일이 아닌 일로 울어본 첫 기억, 순전히 상상만으로 감정이 격해져 본 첫 사건이었다.
독서의 장점으로 상상력을 키워준다는 점을 꼽는다. 나는 이게 외계인이나 괴물처럼 세상에 없는 것을 떠올리는 능력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 특히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더 중요한 상상력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아픔, 내가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집에서 키우던 암소가 팔려가는 모습을 보게 됐다. 송아지를 두고 소 장수 아저씨 손에 끌려가는 암소를 보며 소설 속 흑인 노예를 떠올렸고, 마음이 너무 아파 엉엉 울었다. 그게 바로 공감능력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