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판소리 복서’로 장편 연출 데뷔한 정혁기 “잊혀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 담고 싶었다”

김경학 기자·사진 김정근 선임기자
영화 ‘판소리 복서’로 장편 연출 데뷔한 정혁기 “잊혀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 담고 싶었다”

어스름한 새벽. 해변에 장구 장단이 울려퍼지고, 장단에 맞춰 한 남성이 섀도복싱을 한다. 춤 같기도 하고 복싱 같기도 하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판소리 복서>의 시작 장면이다. 한국 전통음악에 복싱? 안 어울릴 것 같지만 묘하게 어울린다. 지난 1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정혁기 감독(34)은 “시나리오에는 새벽이었지만, 실제로는 해 질 녘에 찍었다”며 “색보정을 묘하게 해 새벽으로 보일 수 있다. 해 질 녘으로 보셔도 좋고 새벽으로 보셔도 좋다”고 말했다.

<판소리 복서>는 과거 챔피언 유망주로 각광받다 한순간의 실수로 영구제명된 전직 프로복서 병구(엄태구)의 이야기다. 다시 링에 서기 위해 병구는 체육관의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지만, 잦은 외부 충격으로 뇌세포가 손상되는 ‘펀치드렁크’를 앓아 쉽지 않다. 영화는 병구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관객이 병구의 사연에 다가가게 한다. 이 영화는 정 감독의 단편 <뎀프시롤: 참회록>을 장편으로 만든 것인데, 주제나 전개 면에서 사실 다른 영화다. 정 감독은 “단편은 과거 이야기가 중간에 몰려 있는데 이번 영화는 과거와 현재가 유기적으로 교차되게 했다”며 “관객이 병구의 정서를 잘 따라올 수 있게 배치했다”고 말했다.

판소리와 복싱, 정확하게는 장구 장단과 복싱이란 참신한 결합은 정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정 감독은 “(대학 캠퍼스에서 우연히) 누가 장구 장단을 치고 있을 때, 복싱을 배우고 있던 (친구) 조현철 배우가 장난삼아 섀도복싱을 했는데,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정 감독도 복싱에 대한 애정이 적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때 복싱 체육관을 다녔고, 복싱 영화·만화를 즐겨봤다. <록키> <성난 황소> <크리드> <그루지 매치> 등 복싱 영화를 오마주한 장면을 넣었다”며 “ ‘장구 장단 복서’ ‘국악 복서’라고 하면 딱 잡히는 게 없었다. 정확히 맞진 않지만 ‘판소리 복서’라고 정했다”고 말했다.

사실 어려움을 겪던 복서가 다시 링 위에 선다는 이야기는 국내외에서 여러 번 다뤄진 서사다. 다소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에 판소리를 접목해 신선함과 재미를 더했다. 특히 영화는 판소리처럼 영화 속 인물들 이야기를 소리로 전한다. 정 감독은 ‘수궁가’를 바탕으로 ‘번개 같은 주먹 병구 주먹’ 등으로 개사했다. 그는 “음절 수와 이야기에 맞춰 개사하는 데만 꼬박 2주가 걸렸다”며 “안이호·권송희 두 소리꾼이 처음에 개사 이야기만 듣고는 어려워했다. 장영규 음악감독과 함께 즉흥적으로 해봤더니 ‘가능할 것 같다’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고 말했다.

홍콩의 대표적인 희극 배우 주성치가 주연한 영화 <서유기 선리기연>(1994)을 가장 좋아한다는 정 감독은 영화 곳곳에 코믹 요소도 많이 넣었다. 언뜻 코미디 영화로도 보이지만, 단순히 웃기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다. 정 감독은 “판소리와 복싱·필름 사진·재개발·유기견·치매 등의 요소를 넣어 전체적으로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것의 아쉬움과 작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정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정 감독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관객들에게 의미 있고, 기억나는 작은 보석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며 “진지한 영화도 하고 싶지만, 진지한 영화라도 제가 남들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코미디 요소는 계속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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