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맥주 팬이라면 뉴잉글랜드 IPA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전 세계 수제맥주 양조장들이 경쟁적으로 만들고 있는, 요즘 가장 유행하는 맥주다.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한 이 맥주는 홉을 많이 넣어 쌉쌀하고 색이 탁한 기존 IPA의 특징에 풍부한 과일향과 주스처럼 상큼한 맛을 더했다.
독특한 맛과 향은 효모가 발효하며 나온다. 이 효모를 여과하지 않고 살려뒀기 때문에 뉴잉글랜드 IPA는 유통기한이 짧다. 대개는 양조장을 직접 방문해야만 마실 수 있다. 희소성은 팬들을 더 열광시킨다.
한국에도 뉴잉글랜드 IPA를 제대로 만드는 양조장이 있다. 서울 염리동의 미스터리(MysterLee) 브루잉이다. 대표 맥주인 ‘트로피아’(7도)는 이름답게 맥주잔에서 열대과일 향이 진동한다. 입안에 머금으면 농익은 과일을 한 입 깨문 것처럼 신침이 가득 고인다. 새콤달콤한 맛이 맥주보다는 주스 같아 계속 벌컥벌컥 마시게 된다.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더블 IPA인 ‘주스 뉴스’(8.5도)는 홉을 곱빼기로 넣은 양조장의 최고급 맥주다. 마른 홉을 냉침하는 ‘드라이 호핑’을 두세 번 거쳐 향미가 여러 겹으로 촘촘하게 느껴진다. 레몬 껍질처럼 밝은 노란빛에 보디감은 착즙주스처럼 진하고 걸쭉하다. ‘이런 것도 맥주인가?’ 늘 마셔온 맥주에 대한 상식이 허물어지는, 즐거운 충격이다.
미스터리 브루잉은 푸드 칼럼니스트 이해림씨와 협업해 다양한 국산 농산물을 맥주 부재료로 활용하는 실험도 하고 있다. 지난해엔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천도복숭아 ‘하홍’과 포도 ‘홍아람’을 사용해 신맛이 강한 사워 에일을 소량 제작해 한정판매했다. 복숭아와 포도는 낙과나 크기가 작아 상품성이 떨어지는 ‘못난이’ 과일을 사용해 농가와 상생한다는 취지도 살렸다.
올해 8월엔 농진청이 자두와 살구를 반씩 섞어 육종한 신품종 ‘플럼코트’로 사워 에일을 만들었다. 10월 현재는 역시 농진청이 개발한 황도 ‘수향’을 넣어 후숙성한 사워 에일을 팔고 있다. 은은한 복숭아 향에 강한 탄산이 어울려 한 잔 마시면 금세 입꼬리가 올라가게 만드는 맛이다.
이달 말쯤엔 강원도농업기술원에서 지원받은 다래를 넣어 맛을 낸 밀맥주 헤페 바이젠을 새로 선보일 예정이다. 바나나 풍미가 있는 바이젠 맥주와 다래가 만나면 바나나키위 스무디 같은 맛이 날까. 상상하니 벌써 침이 고인다.
지속적인 국산 농산물 양조 실험은 지역성과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만국 공통의 수제맥주 양조장 문화를 따른 결과다. 인근 마포구 카페들이 볶은 원두를 번갈아 사용해 ‘커피 스타우트’ 맥주를 만드는 것도 같은 이유다.
미스터리 브루잉은 국내 수제맥주 문화의 산실이라 평가받는 이태원의 펍 ‘사계’를 운영하던 이인호씨(36)와 가로수길 수제맥주펍 ‘퐁당’ 대표 이승용씨(41)가 동업해 2017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국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맥덕’들이다. 직장생활을 하던 이인호씨는 우연히 독일 밀맥주를 맛본 걸 계기로 외국 수제맥주를 차례로 탐닉하다 직접 홈브루잉을 시도하고 종국엔 맥주를 업으로 삼게 된, 전형적인 엘리트(?) 맥덕 코스를 밟고 있다.
그는 수제맥주가 아직 생소하던 2012년 지인들과 함께 맥주 정보 사이트 ‘비어포럼’을 만들어 운영하며 칼럼을 쓰고 동호인 대상 시음 교육을 진행했다. 비어포럼 회원으로 만난 이승용씨와는 그때부터 동업하는 지금까지 매년 보름씩 미국으로 맥주 공부를 하러 다닌다. 많게는 하루에 서너 곳씩 양조장을 돌고 수십 가지 맥주를 맛보며 쌓은 견문이 미스터리 브루잉의 밑바탕이 됐다.
맥주 양조장과 펍,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결합된 형태인 미스터리 브루잉은 오전 11시30분부터 밤 12시까지 영업한다. 6명의 요리사가 파스타 면부터 햄·소시지까지 안주를 직접 만든다. 점심시간이면 커다란 화덕에서 구워낸 피자로 ‘피맥’을 즐기는 직장인들이 많다.
맥주 가격은 파인트잔(약 470㎖) 기준으로 6900~8900원. 이달 13일부터 20일까지는 옥토버페스트를 연다. 3만원을 내면 2시간 동안 5가지 맥주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 축제를 위해 새로 양조한 앰버라거와 코코넛도펠복(코코넛을 넣은 도수 높은 라거), 커피발틱라거(다크 라거) 등이 제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