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너무나 익숙했던 불평등을 조목조목 꼬집다

홍진수 기자

페미니즘프레임 1~3권

류은숙·김명희·정지민 지음

낮은산 | 각 208쪽·223쪽·192쪽

1, 2권 각 1만3000원·3권 1만2000원

지난해 11월3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 센터 앞에서 열린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전국청소년행동연대 날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전연대 등 34개 단체가 참여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3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 센터 앞에서 열린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전국청소년행동연대 날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전연대 등 34개 단체가 참여했다. 연합뉴스

페미니즘은 이미 사회의 현실
번거로워도 계속돼야 할 이슈
학문이나 운동 차원을 넘어
더 깊게 탐구되어야 할 담론
각 시리즈마다 개별 주제와
연관 키워드를 세세하게 살펴
다양한 상황과 경험을 토대로
일상을 통한 ‘구체적 서사’ 담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페미니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 이대로라면 누구도 페미니즘에 토를 달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한국 사회에서 논쟁 대상인 페미니즘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관련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각양각색의 의견이 쏟아져 나온다. 날 선 말이 오가는 성별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전쟁터에서도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옹호하든 배격하든 페미니즘은 이미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괴롭고 번거로워도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 의견이 다르다고 벽을 쌓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페미니즘프레임’은 “우리 자신과 일상을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다르게, 더 깊게, 정확하게 들여다보려는 인문 시리즈”를 표방한다. 출판사는 “페미니즘은 여전히 왜곡되거나 오해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많이 말해지고 더 깊게 탐구되어야 할 담론이기도 하다”며 “우리에게는 학문이나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다양한 위치와 상황에서 경험되는 구체적 서사로서의 페미니즘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책과 삶]너무나 익숙했던 불평등을 조목조목 꼬집다

먼저 1~3권이 나왔다. ‘장소’를 주제로 한 1권의 제목은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이다. 2권은 ‘몸’을 주제로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 3권은 ‘결혼’을 주제로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란 제목을 붙였다.

책 제목에 목차까지만 봐도 이 시리즈가 지향하는 지점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주제와 연관된 12~13개 내외의 키워드가 하나하나의 독립적 소주제이자, 책 뼈대를 이룬다. 저자도 ‘다양한 위치와 상황에서 경험되는 구체적 서사’라는 출판사 기획의도에 맞춰 선정했다. ‘장소’를 쓴 류은숙은 50대 인권활동가다. ‘몸’은 시민건강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예방의학 전문의이자 사회역학자 김명희가 썼다. ‘결혼’의 저자 정지민은 주로 사랑과 연애에 대한 글을 써왔다. ‘메르스 갤러리’를 비롯한 일련의 페미니즘 이슈가 한국 사회를 달군 2015년 결혼했다.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는 일상의 ‘장소’들이 성별이나 계층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펼쳐지는지 살펴본다. 부엌, 교실, 쇼핑센터, 화장실 등 누구나 머물고 경험하는 장소들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다시 보고 너무 자연스러워 지나치기 쉬웠던 불평등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장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다. 동일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장소’를 경험하기도 한다. 장소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또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가족 내에서도 부엌은 밥 먹으러 가는 곳인 동시에 밥을 하러 가는 곳이다. 공중화장실은 대다수 남성에게는 별 의미 없는 공간이지만, 여성에게는 위협이 상존하는 곳이다.

류은숙은 ‘부엌’편에서 이렇게 썼다. “식당 노동자들은 소위 ‘진상’ 손님을 자주 겪는데, 그들이 가고 나면 으레 뒷말을 한다. 그런데 동료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상’ 손님은 밥때 식당에서 밥 먹고 있는 여자들이었다. ‘밥때 다 됐는데, 지 집 가서 밥 안 하고 여기서 저러고 있을까?’가 비난 내용이었다. 여성은 ‘먹이는’ 사람이지, 남이 해준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아니라는 오랜 규범의 질김을 본다. 집을 나와 바깥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이, 집 부엌에 있지 않는 여성을 비난하는 광경은 있어야 할 곳과 역할을 지정하는 폭력의 정점이었다.”

‘파티장’편에서는 이중 잣대를 비판한다. “‘놀 줄 안다’는 말이 칭찬이 되는 성별이 있고, ‘논다’는 말이 낙인이자 비난이 되는 성별이 있다. 법으로 단죄해야 할 범죄 행위조차 ‘노는 행위’로 봐주는 행태는 여성을 노는 일에서 배제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공포를 안겨 준다. (…)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갈라 온 이중 잣대인 ‘창녀’와 ‘요조숙녀’ 사이에서 갈등한다. ‘파티 걸’ 역할을 잘하는 여성을 보면, 묘한 이중 감정을 느낀다. 질시와 거북함이 교차한다. 여성은 잘 끼어 놀아도 욕을 먹고 안 끼어도 욕을 먹는다”고 썼다.

여성환경연대 회원들이 2017년 7월26일 서울 명동역 입구에서 여성 건강권과 몸 다양성 보장을 위한 기자회견을 마친 후 마네킹과 실제 여성의 몸을 비교해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아래).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여성환경연대 회원들이 2017년 7월26일 서울 명동역 입구에서 여성 건강권과 몸 다양성 보장을 위한 기자회견을 마친 후 마네킹과 실제 여성의 몸을 비교해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아래).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은 젠더 고정관념과 성차별주의가 여성과 남성의 몸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본다. 뇌, 털, 눈, 피부, 목소리, 어깨, 유방, 심장, 자궁, 다리 등 신체기관이 주로 분석 대상이다.

‘목소리’편은 ‘애교’라는 ‘K문화’로 젠더 불평등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 저자는 다양한 과학적 근거를 들어가며 “한국의 애교와 일본의 카와이 문화에서 여성들의 목소리 톤이 유달리 높아지는 것은 해부학적 차이로 볼 수 없다”며 “높은 목소리 톤을 바람직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의 힘이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어 “호주 연구팀이 1940년대와 1990년대 젊은 여성들 목소리를 비교 분석한 결과, 눈에 띌 만큼 여성들 목소리 톤이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며 “굳이 애교를 발산할 필요가 사라지고, 공적 영역 진출이 늘어나면서 보호본능보다는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저음의 목소리로 점차 이행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화제가 됐던 ‘안경 쓴 여자 아나운서’ 이야기도 ‘눈’편에 등장한다. 김명희는 “전문 직업인으로서 그저 안경 하나 썼을 뿐인데 ‘용기’라는 말이 등장했다”며 “가장 신뢰받는 언론인으로 매년 꼽히는 손석희 아나운서의 경우, 젊은 시절부터 안경 벗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사실 그의 안경은 명석하고 냉철한 이미지에 크게 기여했다”고 썼다.

책에 따르면 여성의 몸은 ‘성과 속의 분열증’이 은밀하게 혹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소이다. 하얗고 매끄럽고 촉촉한 피부는 숭배 대상이지만, 가꾸지 않은 외모나 과한 치장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여성 생식기는 ‘새 생명을 잉태하는 고귀한 장소’인 동시에 ‘각종 욕설의 보고’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는 결혼을 다룬다. 저자 정지민은 공교롭게도 결혼을 앞두고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된다. 결혼을 앞두고 폭풍 같은 고민에 휩싸이고, 결혼을 한 뒤에도 고민은 이어진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란 무엇인지, 결혼을 통해 평등한 함께 살기는 도달 가능한 이상인지, 아니라면 어떤 대안이 가능한지, 모든 고려 끝에 결혼을 한다면 새로운 시대의 동반자 관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결혼한 페미니스트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페미니즘프레임’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일상을 통한 ‘구체적인 서사’다. 그리고 또 하나를 꼽자면 다양한 층위에서 고민하고 글을 쓰는 페미니스트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1~3권 저자들 글마다 다른 어조가 느껴진다. 누군가는 과격하게 보이고, 또 누군가는 온건하게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까>를 쓴 정지민은 책 에필로그에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것에도 망설였다고 밝혔다. “세상엔 ‘진짜 페미니스트’ 같은 것이 있어서, 선명하지도 급진적이지도 않은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나서서는 안될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꿔 먹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가장 단순하게 접근한다. 페미니즘을 좀 더 범박하게 정의해 보기로 한다. 여성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주는 것,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는 것, 나아가 여성이 가져 마땅한 정당한 권력을 요구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하나의 이미지, 단일한 목소리밖에 없다는 것은 그 집단이 소수라는 방증이다. 페미니즘 역시 그렇지 않을까. 페미니즘이 달성된 사회란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뿐만 아니라, 느슨하고 낙관적인 페미니스트도, 흐릿하고 망설이는 페미니스트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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